입영편지(2부) 1(프롤로그)

by 순례자

이 글은 꽤 오랜 전의 기억을 되살려 쓰는 것입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훈련소에 있는 아들에게 매일 보낸 편지를 잘 모은 스크랩북을 발견했습니다.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잃어버릴 것 같아 브런치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때의 절박함이 여전히 남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로 십여 년을 근무하던 저는 치열한 입시 현장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게 퇴근하는 일상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널리 보면 다 우리 아이들인데 내 학교 우리 반 아이들을 이른바 SKY 대학(당시 의대 진학에 대한 열기는 뜨겁지 않았음)에 진학시키는 것을 교육의 지상 과제처럼 여기던 열병 같은 사회 분위기에 강한 저항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이 암울한 현실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최종의 선택지가 해외한국국제학교였습니다. 그리고 그 탈출에 성공해서 두 나라를 옮겨서 10여 년을 해외에서 살다가 돌아왔습니다.


외국에 오래 살다 보면 기성세대들은 누구나 애국자가 됩니다. 조국이 없는 나의 존재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해외에 나와 있는 십여 년 동안 한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파른 성장을 했고 무엇보다 삼성과 현대 자동차의 도약에 K-POP과 K-뷰티 등의 돌풍으로 한국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너 어디에서 왔니?, 한국! , 하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로 말을 걸어오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조국이 없는 국민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견고해졌습니다.


반면에 해외에 오래 산 아이들은 무국적자가 됩니다. 자기가 교육받고 자란 곳을 고향인양 착각합니다. 살고 자란 곳이 한국보다 더 좋은 여건을 가진 곳이라면 그 성향은 더 강해지지요. 게다가 남자아이들이 대학을 갈 때 쯤되면 군대 얘기는 괴담으로 떠돕니다. 군대 가면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점잖고 고상한 표현입니다. 욕설이 일상어고 밤마다 이유 없이 집합해서 두들겨 맞아야 하루가 끝나고 하도 두들겨 맞아서 아침에 화장실에 볼일 보려고 앉았는데 팬티에 피떡이 져서 가위로 도려내야 한다느니 떠도는 얘기에 아이들은 몸서리를 칩니다. 물론 제가 군생활할 때는 그랬습니다. 인권 문제가 매스컴에 일상이 되는 요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기성세대인 저는 조국이 없는 민족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날로 날로 새록새록 견고해지고 젊은 세대는 할 수 만 있다면 군대를 안 가야겠다는 결심을 단호하게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즈음에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의 계획을 바꿔 놓은 첫 번째 언쟁은 외국대학 유학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간곡히 들어서 한국대학으로 진학하게 했습니다. 이 일도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종에는 본인도 수긍했습니다.


그런데 군대 문제만은 아들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졸업 후에 곧 바로 해외에 취업할 것이니 굳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고, 졸업 후에 곧 바로 취업하는 외국인들에 비해 몇 년을 손해 보면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논리였습니다. 제가 특별히 애국자이거나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은 아닙니다. 단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공평하게 짊어져야 누구나 평등하게 살만한 세상이 된다는 소박한 생각이 저의 신념입니다. 저 역시 공군 32개월 만기 병장 제대를 했고, 남자들이 모인 자리의 끝자락에는 으레 껏 군대 얘기를 빼놓을 수 없고 어떤 이유든 군복무를 마치지 못한 사람은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에 한국을 떠나서 국에 돌아와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아들이 이제 대학생으로 몇 년 보내고 한국문화와 생활에 익숙해졌으니 군복무 얘기를 꺼냈습니다.


이해되고 자신이 납득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아들 녀석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여러 차례 아들과 군입대 문제를 놓고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완고했습니다. 군대를 안 가겠답니다. 이유는 백가지도 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우체함에 병무청에서 온 입영 통지서를 발견했습니다. 그게 아들의 눈에 띄지 않고 제 눈에 띈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봉인을 열고는 뒷 일은 어떻게든 감당하리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원입대에 표시를 하고 길 건너 우체통에 통지서를 넣었습니다.


며칠 뒤 아들 녀석이 아파트 6층을 한달음에 뛰어 올라왔는지 숨이 턱까지 차서 벨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리더군요. 저는 집 안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담박 알아차렸습니다. '그래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속으로 다짐을 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애써 태연한 태도로 문을 열었습니다. 아들은 떨리는 손으로 '병무청 입영 통지서'를 들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게 뭐예요? 두 달 뒤에 입대라니요?, 아들아 일단 들어오렴. 아빠가 설명하마."


그 이후 2주 동안 아들은 저와 단절했습니다. 아무 표정도 없었고 대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의 만행을 몹시 후회하면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저지를 일이니 어떻게든 수습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임박한 카츄사에 지원했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다음에 육군 영어 통역병 지원이 며칠 뒤에 마감된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지원했습니다.

영어 통역병으로 군대 가는 것이 그렇게 치열한 시험을 거쳐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보통 6개월 이상 학원에 다니면서 1박 2일에 걸쳐 진행되는 시험을 위해 기출문제 풀이, 번역, 면접 예상 문제 연습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재수, 삼수도 있다고 합니다. 통역병 학원 홈페이지에 가서 기출문제를 책 한 권 분량으로 출력하고 제본해서 주었습니다. 날짜는 하루하루 가는데 들여다보지도 않더군요.


시험 날이 되었습니다. 이천 국방어학원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는 녀석을 깨우고 부축해서 베개와 담요를 들고 뒷자리에 밀어 넣었습니다. 가는 동안에도 어차피 안될 건대 안 가면 안 되냐고 잠꼬대처럼 해대는 아들을 시험장에 내려놓고 왔습니다.


어찌어찌 시험에 최종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머리는 깎지 않겠다고 우겨대다가 전날 늦은 밤에야 간신히 머리를 깎았습니다. 논산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우려는 아네의 수고는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이대로 입소를 해도 좋을까 조바심이 났습니다. 훈련소 입구를 들어갈 즈음에서야 고개를 조금 돌려서 희미하게 웃고 들어 가더군요. 제 나름대로 '걱정 말아요 아빠'라는 메시지로 해석해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들을 논산 훈련소에 입소시킨 후에 아내와 저는 매일 안절부절못하고 편지를 써댔습니다. 탈영하지 않을까? 그렇게 매일 편지를 써대던 훈련소 편지 얘기로 입영편지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 추신 *


물론 아들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해서 그의 계획대로 곧 바로 해외로 나가 투자은행에 취업했습니다. 어찌보면 아들의 계획이 옳았습니다. 군대를 안가도 됐던 것이지요. 아마도 제가 그때로 다시 돌아 간다면 그런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막 한국에 돌아와서 내 나라의 소중함이 절실했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아들은 군생활 기간이 인생에서 가장 잘 보낸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공동체를 이해하고 인내를 배웠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대학을 나오고 군복무를 하지 않고 입사한 후배 직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군대 안갔다온 얘들 하고는 같이 일하기 힘들어. 병가를 낸 직원의 급한 업무를 나눠서 하자거나, 급한 업무처리가 있으니 마무리하고 퇴근하자고 하면,


"제 일이 아닌대요. 그걸 제가 왜 해요. "


라고 하며 노트북을 탁 닫고 그냥 퇴근해. 공동체를 위해 조금도 양보하지 않아,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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