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영편지(2부) 3

03월 25일- 아빠가

by 순례자

사랑하는 아들아


일기 예보가 정확하구나. 베란다 유리창에 세차게 부딪치는 빗줄기가 여름 장마 같다. 일부 지역에서는 호우 주의보가 내려서 수해를 걱정하기도 한다. 작년 일기장을 보니 온 나라가 가뭄을 겪어 봄철 농사를 걱정하는 농부들의 한숨이 적혀 있구나. 농사를 져본 경험이 없지만, 봄이 오면 농부들은 밭이나 논을 일구고 씨앗과 모종을 심고 병충해 방제를 시작한다더구나. 잘게 부서진 부드러운 땅에 시기에 맞춰 파종하고 비료를 주고 나면 봄비만 내리면 농사 준비는 끝나는 것이지. 농부는 작렬하는 태양아래 영그는 곡식과 과일을 보고 풍성한 수확의 계절을 꿈꾸며 모든 수고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괴테의 『파우스트』 2부 5막에서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on!)"

라는 감동적인 구절이 나오는 것을 기억하지? 파우스트가 늪지 개간 사업을 통해 얻은 결실의 성취감을 얻고 나서 외친 말이지. 파우스트가 인간적, 철학적 도전에 직면하고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사색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무릇 생활에서도 자유에서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날마다 그것을 위하여 싸워 이기는 자만이 자격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20대를 훈련소에서 보내야 하는 우리 아들과 훈련병들의 불편한 심사를 누가 모르겠니.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고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지 할 말과 할 일을 당당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우스트처럼 우리 아들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라는 말을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그날을 기도하며 손꼽아 기다린다.


어제 편지에서 아빠는 훈련병들이 빨래에 자유로워졌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이 됐다. 공동 세탁실에서 세탁기로 빨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니 참 반갑다. 30년 전 얘기지만 군복을 빠는 일은 고된 노동이었다. 한겨울에 얼음 아주 같은 물에 군복을 적시고 뻑뻑해진 옷에 벽돌 같은 빨래 비누를 마구 비벼대도 거품하나 나지 않던

군복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가락 뼈마디가 시리구나. 특히 오늘같이 비가 온 다음 날은 훈련장이 진흙탕이 돼서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오면 흙탕물에 빠진 생쥐처럼 진흙이 범벅된 군복을 세탁할 일이 훈련보다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갈수록 훈련의 강도가 높아져 고되겠구나. 그나마 날씨가 좀 따뜻해져서 다행이다. 우리 아들은 행복한 추억들이 많으니 고되고 힘겨울 때마다 행복한 기억들을 되살려 너끈히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봄비가 그친후에 연초록 생명들이 솟아나듯 이 모든 훈련을 마치면 생명력 충실한 사나이가 되는 거다.


언젠가 우리 아들에게 군생활 동안을 낱낱이 기록한 아빠의 일기장을 보여준 적이 있지? 자대 배치 후에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점호가 끝난 뒤 인기척이 사라지면 모포를 뒤집어쓰고 반디펜으로 적거나 화장실에 가서 일기 적기를 계속했다. 내 일상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하게 미치는지 모든 촉각을 세우고 기록해 나가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단다. 하늘의 한점 바람도, 햇볕도, 군 보직과 업무 어느 것 하나도 우연이 이루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일기장을 넘겨 보면서 깨달았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형편을 아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됐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우리는 좀 멀리 있고, 원할 때 만날 수 없지만, 우리 하나님이 네 마음속에 계시고 언제나 너와 동행하신다.

매일 편지를 쓰는 것은 너를 군대에 강제로 보낸 아빠의 참회록 같은 마음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네게 편지를 쓰면서 30여 년 전 군생활을 했던 아빠를 되돌아보게 됐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확인했다. 아빠는 우리 아들이 군복무 기간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며 쓰게 되는 것이란다. 우리 아들은 절제와 결단력이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으니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 안심한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입시생인 고등학교 3학년까지 거의 빠짐없이 주일 아침잠을 이겨내고 예배 헌금 연주를 해낸 너의 인내와 정신적 승리를 늘 돌이켜 보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12개의 기념비를 세운 것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그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 후손들이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그런 기념비를 세워 나가자.


오늘의 훈련은 어땠니? 곧 유격 훈련을 할 텐데, 아빠 기억에는 가장 고된 훈련이었던 것 같다. 너야 기초 체력과 순발력이 좋아 잘 해내겠지. 무릎이 걱정이구나. 고장 난 무릎이 잘 버텨주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고된 훈련의 순간마다 이 일들을 멋지게 끝낸 너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겨내리라 믿는다.

4월 11일 수료식날 우리 아들을 볼 날만을 기대한다. 우리 늠름한 아들을 가슴에 안아보고 싶구나. 동기들과 좋은 우정을 쌓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반갑다. 너도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는데 한 명 빼놓고 대부분 형이라니 그것도 오히려 좋구나. 영어 통역병 대부분이 전 세계에서 온 아이들이라니 서로 의지하고 배울 것이 많겠구나.


책 읽기에 유독 욕심이 많은 네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하구나. 너무 많은 계획으로 마음을 쫓기게 하지 말기 바란다. 편안하고 천천히 환경에 적응해 나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면 된다. 지금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강건하게 잘 만들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창밖에 나무들이 세찬 봄비와 바람에 우쭐우쭐 춤을 춘다. 오히려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구나. 연초록 생명들이 가지 끝에서 푸르게 올라온다. 이 비가 오고 나면 온 땅이 눈부신 녹음으로 덮이겠다.



곧 만나기를 소망하며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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