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이 어려운 시대

불안을 관리하느라, 아이를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by 아우리

며칠 전 놀이터를 지나쳤습니다.
미끄럼틀과 그네는 그대로였는데, 아이는 없었습니다. 대신 그 시간, 도로변에 멈춰 선 노란 셔틀버스 앞은 늘 붐볐습니다. 정적과 소란이 뒤바뀐 그 풍경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비어 있는 놀이터

예전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가방을 던져두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흙바닥에서 넘어지면 무릎을 털고 다시 뛰었고, 친구와 싸우면 씩씩거리다 어느새 다시 붙어 놀았습니다. 그 시끌벅적한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아픔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관계의 온도를 스스로 배웠습니다.

지금의 놀이터가 비어 있는 이유는 아이가 줄어서도 있겠지만, 아이의 시간이 너무 촘촘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영어와 논술, 예체능, 그리고 이동 동선까지. 아이의 하루는 마치 빈틈없는 어른의 일정표처럼 관리됩니다.


사랑이 먼저 치워버린 것들

요즘 부모의 사랑은 속도가 빠른 것 같습니다. 아이가 넘어지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가고, 갈등이 생기기 전에 어른들이 먼저 개입하기도 합니다. 실패를 겪지 않게 해주는 것이 배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볼 기회를 잃습니다.

조금의 불편과 좌절은 아이를 단단하게 만드는 재료입니다. 넘어져 본 아이가 조심을 배우고, 다투어 본 아이가 관계의 무게를 압니다. 실패를 지워버린 사랑은 때로 성장을 함께 지워버립니다.


다른 풍경의 아이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정반대의 풍경도 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청소년 센터의 아이들에게는 학원 셔틀도 촘촘한 일정표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과도한 관리보다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스로 버텨내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다른 종류의 걱정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과도한 개입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방치에 가까운 환경에서 크는 아이들 사이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경제적 격차가 이제는 경험의 격차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한쪽에서는 실패를 미리 막아주느라 아이의 자생력을 지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실패를 감당해 줄 어른이 없어 아이가 홀로 상처 입습니다. 문제는 그 두 극단 모두가 아이에게 온전히 건강한 성장의 토양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충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

요즘 “대충 키우라”는 말은 육아의 트렌드이자 위로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그 말은 누구에게나 쉽게 허락된 선택지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대충'은 여유로운 철학이지만, 누군가에게 '대충'은 생계에 쫓긴 방치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매니저가 되지 않아도 아이가 안전한 사회,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환경. 그것은 부모 개인의 결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충 키운다’는 말이, 사실은 사회가 먼저 감당해야 할 몫을 부모의 태도로만 돌려버린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아이를 키우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나의 불안을 관리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 내가 아이를 위해 대신해준 일 중, 사실은 아이의 몫이었을 일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대신해줄 수조차 없었던, 그늘진 곳의 아이는 없었는지.
조용히 돌아보게 됩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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