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의 뿌리를 찾아서
수능 전날, 온 가족이 숨을 죽인다.
시험 당사자인 고3 학생만이 아니라 부모와 동생들까지 덩달아 긴장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부터 몰려든 인파 속에서 자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전날 밤부터 대기하는 응시생들, 답안을 봉인해 제출하고 필체를 감추기 위해 서법으로 다시 베껴 쓰던 절차, 합격자 발표일이면 서울 시내가 들끓었다는 풍경은 오늘의 입시와 겹쳐 보인다.
왜 시험은 언제나 개인을 넘어 가족과 사회 전체를 흔드는 걸까. 이 질문은 천 년 전에도 던져졌었다.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이 958년에 도입해 조선까지 약 천 년간 이어졌다. 문과(문관), 무과(무관), 잡과(기술직)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특히 문과는 관리 등용의 핵심 관문이었다.
시험은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렸고, 합격자는 곧바로 관직과 병역 면제의 혜택을 얻었다. 누구나 응시 가능하다고 했지만, 수십 년간 생업을 제쳐두고 공부에만 매달릴 경제적 여유가 필요했기에 실제 시험장에 선 이들은 대부분 양반 자제였다. 그러나 십 대 소년부터 팔십 대 노인까지 응시했다는 기록은, 나이와 무관하게 실력만으로 인재를 뽑는 원칙이 지켜졌음을 보여준다.
시험 문제는 놀라울 만큼 짧았다.
세종은 “농사와 징병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광해군은 “나이를 먹으면 왜 서글픈 마음이 드는가?”, 숙종은 “울릉도에 외인이 나타났을 때 왕래를 허용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뒤에는 유교 경전을 꿰뚫는 학문적 깊이와 현실 문제를 풀어낼 사상적 역량이 요구되었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지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가로 88센티미터, 세로 1미터 64센티미터 크기의 거대한 종이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것은 단순한 분량이 아니라, 경전 인용과 체계적인 논리, 문장력이 결합된 ‘논문 수준’의 글이었다. 정조가 직접 붉은 글씨로 채점한 흔적도 남아 있다. 무작정 자기 생각만 늘어놓으면 탈락이었고, 반드시 경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풀어내야 했다. 모범 답안은 『국조방목』에 수록되어 후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단순한 암기 대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식과 사유, 문장력과 품격까지 요구하는 종합적 훈련장이었다.
오늘날 대학입시가 개인과 가족, 사회 전체를 긴장시키듯, 과거시험도 공동체의 명운이 걸린 사건이었다. 시험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을 달았을 뿐, 언제나 공정과 간절함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리고 경쟁률 1만 대 1이었다는 과거시험의 험난한 문턱을 떠올려 보면, 오늘의 긴장도 조금은 견딜 힘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