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그럭저럭

- 물건과의 이별 ④ 우리 생각할 시간을 갖자

by 차슈

개인적으로 좀비물이나 재난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등장인물들이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감각이 극대화되기 때문인 듯싶다. 영상 속 내용들은 모두 허구라고 인지하고 있으니 사람이 죽든 도시가 무너지든 마음껏 즐기는 것이겠지만 실제라고 상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짧으면 하루나 이틀 안에 수도나 전기를 비롯한 필수적인 인프라가 마비되고 기지국을 통한 여타 통신이 불가능해짐은 물론 물건의 생산과 유통이 정지되면서 당장의 식재조달부터 어려워질 것이다. 공기 없이 3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라 했던가. 영화를 보며 갑자기 불안해진 나는 인터넷에서 생존가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생존가방은 안전한 대피처로 이동하는 동안 필요한 최저한의 물품을 담은 가방으로, 개개인의 건강상태나 이동경로, 가지고 있는 음식의 질과 양, 이동 인원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그 내용물은 천차만별이다. 보통은 3일간의 생존을 기준으로 싸는 것이 보편적이라 하며 식수> 식량> 보온의 순서로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음식물의 수분 함유량이 많다면 식수를 조금 뺄 수도 있고 대피시기가 여름이라면 보온보다 식량을 더 신경 쓸 수도 있다. 또한 생존가방은 말 그대로 사람이 짊어지고 옮겨야 하는 가방이기 때문에 총무게도 고려해야 하며 이동경로에 따라 캐리어를 쓸지 배낭을 멜 지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인터넷에 나온 블로그와 생존가방 판매 사이트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알게 될수록 재난에 대비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되게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존가방 구성의 목적은 '생존'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인적인 선호나 취미 등 다른 요소가 개입할 틈을 준다는 것은 생존에 치명적일 수 있다. 가방에 담기는 모든 구성품은 '생존에 필요한가'라는 절대적인 원칙을 통과한 것들 뿐이다. 생존가방을 알아보게 된 것은 일말의 불안과 호기심에서 시작된 유희였지, 닥치지도 않은 재난에 진지하게 대비한 것은 아니었다. 원시시대 인류의 조상은 매일이 이런 생존의 연속이었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물건이 풍족해 버리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감사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이 필요해 보이고 언젠가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아깝다면 생존가방을 싸는 것처럼 하나의 대원칙만 있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자. 가방 하나 빼고 다 버려야 하는 상황은 현실적이지 않으니 물건을 버릴지 말지 고민이 될 때 적용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대체재의 유무'가 그것이었다. 예를 들면, 일 년 대부분의 시간을 공간만 차지하다 겨울에 꺼내게 되는 가습기의 경우 수건을 적셔 널어놓는 것과 분무량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올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낼 예정이다. 없어도 다른 물건들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필요보다 욕심이 아니었을까. 방 귀퉁이에 마련해 둔 박스에 버리는 판단이 애매한 물건들을 담아두고 별 탈 없이 시간이 지난다면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을까. 눈에 밟힌다는 이유로 의미 없는 만남을 지속하기보다 잠시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갖자. 더 이상의 미련 없이 서로에게 안녕을 보낼 수도, 서로의 소중함이 되살아나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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