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하라
하라는 우리 집 반려묘 이름이다.
남편 성이 강 씨니 붙이면 강하라가 된다.
아들 장가가면 태어날 손주나 손녀 이름으로 생각했던 예쁜 이름 하라.
아들 장가보다 더 먼저 우리 집으로 온 아이는 처음부터 늙은 부부와 살진 않았다.
아들이 바빠지면서, 아니 남편이 너무 좋아하니 아들이 아빠한테 양보한 셈이 되겠지만
아무튼 지금 우리 집의 애교쟁이로 살고 있다.
출퇴근의 격한 반김과 저녁 시간을 책임지고 있는 고양이 하라는
이제 우리 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집에서 동물을 키운다는 생각을 애초에 가져본 적 없었다.
시골 마당이나 대문 밖에 살았던 강아지 독구를 예뻐하진 않았다.
꼬리가 떨어지도록 반기는 모양을 보아도
그래,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안다. 그만 흔들어라, 한마디 던져주고 갈 길을 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기억 속의 시골 그림 완성은 언제나 집 밖을 든든히 지켜주던 독구였던 것 같다.
잘 모르지만 하라는 고급종이라 했다.
눈빛이 파란, 옥색을 가져 그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하루의 피로가 다 날아간다.
이름 부르면 조르르 달려와 내 무릎에 안기거나 골골송이나
다문다문 온몸 구석구석 밟아주는 지압까지 재치꾼 하라.
눈 뜨면 남편과 나는 하라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서로에게 잘 잤느냐? 묻지 않고 제삼자 하라를 통해 말을 한다.
아들이 있을 땐 아들 통해 의사소통을 하더니 이제 고양이 하라가 우리 사랑의 가교 구실을 한다.
반려견, 반려묘, 식물 집사.
마음 두고 사랑을 쏟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곁에 두지 않았을 때는 잘 몰랐다.
이 아이들이 주는 따뜻함과 사랑을 그리고 말랑해지는 게 순수해져 가는 나를 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운동장 놀이하듯 온 방을 뛰어다니더니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의자 위에서 쪽잠을 즐기는 고양이 하라, 강하라.
귀여운 모습 카메라에 담아 빗속을 뚫으며 출근길에 오른다.
스트레스 쌓이거나 점심시간 산책을 하거나 그럴 때 혼자 꺼내 보며 배시시 웃는다.
하라 뽕뽕이, 아기 같은 목소리로 집에서 기다릴 하라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