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틀 타기

미끄럼틀 타기

by 들국화

출장 간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미끄럼틀이 눈에 들어온다.

아, 미끄럼틀 탔던 적이 언제였더라.

오늘은 너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와 봐야지, 후후.

전해줄 서류를 넣어주고 얼른 미끄럼틀 있는 놀이터로 달려가는 나는

여덟 살 그때 초등학교 일학 년으로 돌아간다.


유월 햇살에 뜨거워져 스테인리스가 살을 태울 것 같아도 타고 또 타고

바람을 가르며 내리 꽂히는 그 맛에 해지는 줄 몰랐었던 그날의 아이가

쉰아홉 어설픈 어른이 되어 미끄럼틀 계단을 오른다.

벅차다.

그런데 미끄럼틀 초입에 앉아 내려갈 거리를 보니 너무 짧다.

그때는 엄청 길어 보였는데 숨 한 번 크게 쉬고, 내려갑니다.

지갑 쥔 왼손과 오른손으로 살며시 잡고 처음엔 천천히 출발하여

마지막 클라이맥스에는 바람보다 빠르게 그리고 모래에 엉덩이를 박는다.

예전 그대로 탔을 뿐인데 어딘가 아프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그만 미끄럼틀 쇠에 꺾이고 만 것이다.

누가 볼세라 얼른 아픈 손가락을 숨긴 채 차에 오른다.

욱신욱신 많이 아프다. 설마 골절된 건 아니겠지.


얼마 전 병원 갔더니 손가락마다 골다공이 있다고 젊은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었다.

이 나이쯤 되면 당연하다는 듯 손가락 뼈가 하얗게 바래진 엑스레이를 무심히 보여줬다.

왈칵 겁이 났다.

나이는 생각지 않고 무거워진 몸뚱이를 한순간 잊어버린 자신을 탓하며

아픈 손가락 자꾸 주무르며 접었다 폈다 반복해 본다.


나이 들면 사소한 것들이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미 쓰임 다한 몸뚱이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잘 데리고 다니면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는 내내 욱신거려도 남편에게 사실을 고할 순 없어 혼자 아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손가락부터 접었다 폈다 해보니 어제보다 덜 아프다.

조금 아픔은 주었지만 머리카락 휘날리며 내달린 미끄럼틀의 희열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달큼하다.


분교 운동장 끝에 있는 늑목 그네 철봉

어느 것 하나 변한 것은 없지만 내가 변해서 늙어서 그네는 타면 어지럽고 철봉은 매달려지지도 않고

늑목은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바라만 보지만 그래도 좋다.

그네에 앉으면 어린 내가 보여 좋다. 푸른 하늘이 출렁거려 좋다.

더없이 철없는 인생 중반이라 더 좋다.

다음 출장도 그 학교에 가게 되면 꼭 타 볼 것이다.

그래서 쌓인 생활 스트레스 활활 날려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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