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생중계 대선 후보 토론회, 세 번째 주제는 ‘디지털 경제와 미래 통화정책’이었다. 비교적 조용하게 흘러가던 순서. 이번엔 김대혁 후보가 고개를 들었다. 보수 진영의 경제통으로 불리는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창명 후보님, 최근 후보께서 스테이블코인의 정부 차원 도입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건 결국, 정부가 민간이 하던 코인 발행·유통 영역에 직접 뛰어들겠다는 뜻 아닙니까? 국민 세금으로 또 하나의 ‘디지털 화폐 실험’을 하자는 건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창명은 마이크 앞에서 미세하게 숨을 고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과 정부가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 즉 CBDC는 다릅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기존 화폐의 디지털 버전입니다. 말 그대로 ‘전자지폐’죠. 정부가 찍는 돈이고, 그 돈은 중앙은행의 부채로 기록됩니다.”
이창명은 잠시 멈추었다가 시선을 돌렸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이 법정화폐에 가치를 연동시켜 만든 ‘디지털 결제 수단’입니다. 문제는 그 시장이 지금까지는 사실상 무규제 상태였다는 겁니다. 정부의 검토는 ‘코인을 새로 찍겠다’가 아니라, 이 무규제의 영역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다시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지금까지의 혼란은 ‘누가 돈을 발행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신뢰를 관리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그 신뢰의 주체가 투기 세력이 아니라 국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가 이창명을 비췄다.
“아마 오늘 방송을 보고 계신 많은 유권자 여러분들이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대한 많은 우려를 가지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먼저 이렇게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원화, 실제로 ‘현금’으로 존재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요?”
김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7% 남짓입니다. 나머지 90% 이상의 돈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은행 계좌의 숫자로만 존재합니다. 이미 우리는 디지털 원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는 있습니다. 지금의 디지털 원화는 투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급하고 흘러가는지 국민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스테이블코인은 그런 ‘보이지 않는 신뢰’를 기술로 시각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USDT, USDC─테더와 서클 두 가지 모두 ‘1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입니다. 하지만 USDT는 테더라는 중화권 자본이 운영하고 있고, 회계는 불투명하며, 미국 국채로 안정성을 담보하지만, 상업어음 같은 유동성 낮은 자산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반면 USDC는 미국 정부와 협력하는 서클(Circle)이라는 회사가 발행하며, 100% 미국 단기 국채와 현금으로만 담보합니다. 정기 회계감사도 받고, 발행 내역도 실시간으로 공개합니다. 겉으론 똑같은 ‘1달러짜리 코인’처럼 보이지만, 신뢰의 구조가 전혀 다릅니다.”
카메라가 패널석의 토론진들을 스캔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실시간 채팅창에는 ‘설명 깔끔하다’, ‘듣고 보니 이해된다’는 반응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창명은 말을 이었다.
“저는 민간이 통제 밖에서 ‘화폐처럼 통용되는 토큰’을 무제한으로 만들어내는 세상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논의를 하게 된 이유는, 정부가 기존 화폐 시스템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된다면, 민간에서 발행하되, 정부가 신뢰의 기준과 기술적 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바로 스테이블코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시장과 국가가 함께 ‘디지털 신뢰’를 구축하는 새로운 통화 질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디지털 원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면 정부 보조금이나 청년 수당 같은 공공 자금을 보다 빠르고 투명하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민간 결제망을 통해 집행되지만, 그 흐름은 블록체인으로 기록되어 국민의 세금이 어디로 쓰이는지 명확히 추적할 수 있겠죠. 나아가 정부투자기관이나 공공펀드가 벌어들인 배당 수익의 일부를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국민에게 돌려주는 구조도 가능합니다. 즉, 국민이 주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벌어들인 공공 이익을 디지털 통화로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체계─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복지이자 금융 민주주의로 나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김대혁이 말을 잇기 어려워하자, 사회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후보님께서는 스테이블코인이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이창명은 미소를 지었다.
“보완도, 혁신도 아닙니다. ‘복원’입니다. 돈은 결국 신뢰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 시스템은, 어떻게 발행되고, 어디에 쓰이며, 누가 결정하는지 대부분의 국민이 알지 못합니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바꾸고, 정부가 국채를 찍고, 시중은행은 그걸 담보로 대출을 늘립니다. 이 모든 과정은 정부의 정책 안에서 이뤄지고, 결과만 통보받는 것이 국민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통화,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다릅니다. 기술적으로는 발행, 담보 상태, 유통량 등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누구나 그 흐름을 감시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서 ‘정책적 개입’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투명성이 바로 견제와 감시의 기반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통제 메커니즘을 설계할 수 있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디지털 복지 수당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고 그 사용 흐름이 실시간 공개되거나, 공공 배당 구조와 연동돼 내 세금이 어떤 공공자산을 통해 돌아오는지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통화 시스템을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서 ‘참여하는 것’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토론이 끝나고 무대 조명이 꺼졌다. 대선 후보자들이 순서대로 퇴장하며 악수를 나누는 와중에, 이창명은 퇴장하면서도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악수도, 인사도, 마치 다 지나간 절차처럼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무대 밖, 그다음 전장으로 향해 있었다.
검은 벽면 뒤로 돌아선 순간, 보좌관 유정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 그렇듯, 말없이 손에 커피 하나를 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창명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며 유정민이 입을 열었다. 이창명은 커피를 받아 들고 잠깐 숨을 고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좀 힘들었어. 스테이블코인을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꺼낼 줄은 몰랐어.”
유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민 세금으로 ‘또 하나의 코인 사기’라는 프레임, 딱 그쪽다운 방식이죠. 불확실한 건 전부 사기라고 몰아가는.”
이창명은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그래서 오히려 기회였어.”
유정민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기회요?”
“응.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 은행에 있든, 지갑에 있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실체’라고 믿는 거지. 근데 오늘 처음으로 말했어. 지금 우리가 쓰는 돈은 종이가 아니라 기록이고, 흐름이라는 걸. 그리고 그 흐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움직이는지─ 정작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유정민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걸 보이게 만들겠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보이게 만들고, 참여할 수 있게 할 거야. 돈이 어디로 흘러가고, 어떻게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지. 그걸 기술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건 통화가 아니라 신뢰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되는 거지.”
유정민은 몇 초간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작게 웃었다.
“정치판에 한평생 계셨던 분치고는, 너무 금융 쪽 말씀만 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창명도 웃었다.
“정치가 시장을 외면하면, 시장이 결국 정치까지 바꾸더라고.”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유정민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오늘, 잘 전달됐을까요? 그 말들, 국민들이 알아들었을까요?”
이창명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다 알아듣진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 뭔가 바뀔 수 있겠구나’ 하는 감각─ 그건 느끼지 않았을까? 그게 시작이야.”
다음 날 오전, 이창명 캠프 전략회의실. 유정민은 한 장의 프린트를 들고 들어왔다. 회의실 대형 스크린에는 여전히 전날 토론 장면이 무음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이창명이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의견을 말하던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유정민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한국은행에서 공식 입장이 나왔습니다. 스테이블코인 관련 후보님 발언에 대응한 브리핑이에요.”
이창명이 시선을 돌렸다.
“어떤 반응인가요?”
유정민은 종이를 탁자 위에 놓으며 읽었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국가 통화 질서와 금융안정에 직결된 사안이다. 중앙은행이 이 흐름을 외면하지 않고, 민간 스테이블코인 병행 모델을 주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장이 핵심입니다─ ‘화폐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운영방식과 책임구조가 명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창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은이 여기까지 얘기하는 건 이례적이네요.”
유정민은 말을 이었다.
“어제 후보님의 발언은 단순한 기술 논의나 캠페인 구호가 아니라 정책 테이블 위로 ‘디지털 통화’ 논의를 올린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창명은 창밖 먼 곳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결국 핵심은 그거야.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돈이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게 진짜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지.”
유정민은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질문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코인을 인정할 것이냐’가 아니라 ‘누가 신뢰를 설계하고 관리할 수 있느냐’로 말이죠.”
이창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 무게를 우리가 감당하겠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이 온 거지.”
이창명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 안에 조용한 숨소리만 흘렀다. 잠시 뒤, 뒤쪽 벽에 기대고 있던 장민혁이 입을 열었다.
“스테이블코인이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시스템에 어떻게 ‘변조할 수 없는 룰’을 심어놓느냐 하는 문제도 검토해야 합니다.”
모두가 장민혁을 바라봤다.
“스테이블코인의 진짜 무서운 점은 이 시스템의 구조가 잘못되면, 그 신뢰는 단 하루 만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루나 코인 등이 이런 실패를 가져왔고, 만약 정부가 개입한 스테이블코인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엄청난 사안으로 파급될 수 있습니다. 또 한은에서 이렇게 이례적으로 나선 건, 현재 당선이 유력한 우리 후보님의 정책을 지지하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본인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디지털 화폐 시장에선 스테이블코인의 헤게머니를 어디서 갖느냐에 따라, 이 나라에서 ‘실물 없이 돈을 움직이는 권한’이 어디로 가느냐가 정해질 텐데…. 이 ‘그림자 재무부’를 어디서 핸들링 할 것이냐 하는 싸움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시작된 느낌입니다.”
장민혁의 말은 겉으론 분석처럼 들렸지만, 유정민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상황 설명이 아니라, 이미 머릿속에 로드맵이 있는 자의 언급이었다. 유정민은 숨을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이 후보의 경제 공약만 생각하고 있었지. 이 판에서 누가 먼저 디지털 통화의 손잡이를 쥐느냐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해 보지 않았다. 장민혁은 이미, 어디서 그 손잡이를 쥘지 정해둔 게 아닐까?’
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다시 장민혁을 바라봤다. 그는 언제나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얼굴을 한다.
‘이번 판의 끝이 어딘지를, 나보다 먼저 짚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너무 이창명 후보의 선거 승리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정민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판이 빨라지고 있었다.
정민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진은 여전히 모니터 두 대를 켜놓고 무언가 분석하고 있었다.
“왔어?”
도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유정민은 가볍게 웃으며 소파 한쪽에 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맨날 야근이냐?”
“내가 이렇게 야근하고 있어야 네가 집에 가기 전에 들를 때라도 있잖아.” 도진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장민혁 실장이 회의에서 한 말이 걸려서.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지나치게 정확한 의식을 갖고 있더라고. ‘실물 없이 돈을 움직이는 권한’이 어디로 가느냐가 이번 정책의 본질이라고 말하더라고. 그리고 한은의 발표로 헤게머니 싸움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도진은 마우스를 움직이다 말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 본심을 드러낸 건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그냥 분석처럼 말했는데… 내 직감은 그렇게 반응했어. 설명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내놓은 사람처럼 말하더라고.”
도진은 조용히 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렸다.
“장 실장은 예전부터, ‘가치는 소유보다 설계가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하던데. 금융위에 있을 때부터 정책을 주도하던 양반이니까. 네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그 시스템이 이제 스테이블코인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본 거지.”
유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선거만 보고 움직이고 있는데, 그는 벌써 이후를 내다보고 있더라고.”
잠시 침묵 후 도진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든, 우리는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해. 그게 살아남는 쪽의 조건이니까.”
유정민은 고개를 떨군 채,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살아남는 쪽의 조건이라….’
『세력자들』| 최성환 | 책들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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