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청 한 사발에 담긴 마음

아빠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01

by 빨간머리키키

인터뷰 첫날이었다. 아빠와 나 둘 다 약간은 어색했다. 서로 이웃해서 살고 있긴 하지만 그리 왕래가 잦지 않은 부녀지간이었다. 특히나 40대와 80대 사이의 세대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본가에 방문할 때마다 내 말 상대가 되어 주는 사람은 아빠보다는 엄마였다.

그렇기에 아빠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는 내 제안을 기꺼이 수락하신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노트북을 켰다. 자판에 손가락을 얹은 채 빈 화면을 한참 보고 있었다. 무슨 질문부터 할까?


"아빠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은 언제예요?"


아빠도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또 노트북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음. 그때 내가 여섯 살이었을 거다.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였지."


아빠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낱말은 내 귀에 무척 생소했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내 할머니는 아빠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랬기에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제에서 해방되기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는 하는데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 삶의 첫 기억 -


그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설을 며칠 앞둔 아주 추운 겨울 새벽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나를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따뜻한 손이 일어나기 싫어하는 나의 등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에도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비몽사몽 앉아있었다. 그 순간 입으로 따뜻하고 달큰씁쓸한 것이 흘러 들어왔다.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눈앞에서 엄마가 웃고 있었다.


"맛있나?"

엄마는 눈가에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는 김이 폴폴 오르는 시커먼 액체를 담은 숟가락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아~ 해 봐라. 이거 조청이다. 금방 했다."

나는 엄마가 내민 조청을 한입에 덥석 물고는, 내 손으로 숟가락을 쥐었다.


"엄마, 맛있다. 더 있나?"

엄마는 조청이 가득 담긴 종지를 내밀었다. 가마솥에서 금방 떠 온 조청은 무척 뜨거웠지만, 나는 후후 불어가며 그 단맛을 음미했다.


"천천히 먹어라. 많이 있다. 아버지 다 드시면 더 갖다 줄게."


옆을 보니 아버지도 밥공기 가득 김이 나는 조청을 후후 불며 드시고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씨익 웃으셨다. 내 코끝에 약초 냄새가 달콤한 냄새와 섞여 맴돌았다.


엄마는 나를 귀하게 여기셨다. 모든 자식이 다 이쁘겠지만, 그 시절에 시집와서 연이어 딸만 낳다가 얻은 늦둥이 아들이다 보니 그 마음이 남달랐던 것 같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는 매년 겨울이면 조청을 했던 것 같다. 겨울을 대비해서 아버지는 산에서 약초를 캐 와서 말리셨다. 아버지는 약초를 잘 아셨다. 그러면 엄마는 그걸로 가마솥 한가득 밤새 조청을 고았다. 타지 않게 국자로 젓고 또 저어 걸쭉해질 즈음, 새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과 아들을 깨워 첫 사발을 내밀었다.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귀한 것을 한시라도 빨리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다.


이것이 나의 첫 기억이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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