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로 엄마의 상여를 지켜보다

아빠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02

by 빨간머리키키


나는 친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아빠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차돌처럼 반질반질한 큰고모와 외모가 가장 비슷하고, 성격은 둘째 고모처럼 정확하고 반듯했다는 말을 들어 나 혼자 어떤 분일까 상상만 해 보았을 뿐이다.

본가는 매년 설이 지나고 며칠 안 있어 할머니의 기제사를 지내고 있다. 어릴 적 기제사날이면 고모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항상 반갑고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특히 고모들이 기제사에 와서 정월대보름까지 우리 집에 묵기라도 하면 겨울방학이 한층 설레고 북적했었다. 내게 할머니는 고모들을 만나게 해 주는 존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은 새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랬기에 친할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것 같다. 친할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우연히 엿듣게 된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래서 아빠에게 할머니에 대해 묻는 건 다른 질문들보다 조금은 막연했다.


“아빠,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기억나세요? 아빠는 그때 몇 살이었어요?”


아빠는 기억을 더듬는 듯 한참만에 말을 시작했다.

“잘 기억 안 나지. 그때 내가 설 쇠고 일곱 살이었는데. 딱 한 장면만 기억난다. 사진처럼.”


“장례 마지막 날, 엄마를 장지로 옮길 때 그걸 내가 봤어. 동네 사람들도 다 나와서 보고. 갑작스러운 장례라 아무도 아이들을 챙길 경황이 없었던 모양이야. 내가 맨발로 서서 엄마 장례 운구행렬을 쳐다봤던 기억이 꼭 사진처럼 남아있어.”


매서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어린아이가 맨발로 서서 자신의 엄마를 실은 상여가 길을 떠나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광경이 떠올랐다.




- 엄마의 장례식 -

일곱 살 되던 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몇 달 앞두고였다.(1945년)

아버지는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지런한 농부였고, 엄마도 그에 못지않게 성실한 아낙이었다. 그 시절, 결혼하고 딸만 낳았어도 아버지와 엄마는 정이 좋았다. 그런 중에 어머니 나이 서른셋에 내가 첫아들로 태어나고 연이어 남동생 둘이 더 태어났다. 일제 치하의 어두운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은 다복했고 형편도 그럭저럭 굶지 않고 살만했다.


또 엄마는 건강했다. 몸집은 작았지만 강단이 있었고, 시집간 딸부터 갓난쟁이 막내아들까지 부지런히 거두면서도 집안 농사, 대소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큼 강골이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죽음이었다.

설이 지나고 이웃집에 초상이 났는데 엄마는 그 집 일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상갓집에서 얻어먹은 떡이 그만 급체로 이어졌다. 그렇게 며칠을 앓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엄마가 상갓집에 가서 동티가 났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버지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열여섯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에 일곱 살, 다섯 살, 갓난쟁이까지 자식이 넷이나 남아있었다. 장례도 급하게 준비되었다. 아직 어린 누나가 아버지를 도와 장례를 치렀을 텐데 뭐가 그리 체계적으로 되었을까 싶다. 그러니 장례기간 동안 나와 내 동생들이 살뜰한 보살핌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날은 장례 마지막 날이었는데 무척 추웠다. 엄마를 실은 상여가 집안 선산으로 출발하기 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배웅을 했고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상여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그때 나는 얇은 저고리와 홑바지 바람에 맨발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 행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도 못 한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시기를 선택할 수 있다면, 네다섯 살 때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로 돌아가서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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