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다

아빠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03

by 빨간머리키키

가끔 할매꿈을 꾼다. 어릴 때 같이 살던 모습 그대로 꿈에 나타나는데 깨고 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할매는 아빠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할아버지와 재혼을 했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까지 우리는 같이 살았었다. 어릴 때는 할매가 우리 아빠를 낳아준 엄마라고 믿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날,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할매가 아빠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여덟 살인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 할매에게 물었다.

“할매, 할매가 우리 아빠 친엄마 아니가?”

할매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거 누가 말 하드노?”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할매와 나 사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그전까지 나는 엄마에게 혼날 때면 할아버지와 할매가 사시는 상방(上房)으로 달려가 숨어버렸다. 엄마, 아빠가 할아버지와 할매 앞에서는 나를 혼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대여섯 살쯤 엄마가 숨겨놓은 간식을 훔쳐먹고는 겁이 나서 상방으로 도망쳐서 일주일 동안 끼니를 해결하며 방 밖으로 안 나간 적도 있었다.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를 지나면서였다. 나는 누군가에게든 반항을 하고 싶었고 그 대상은 가장 가까이 있는 할매가 되었다. 그즈음 셋방살이를 시작하며 할매와 나는 한방을 쓰고 있었다.


나는 할매와 이불을 갖고 다툼을 많이 했다. 외풍이 심한 셋방에서 할매는 두꺼운 이불을 모조리 꽁꽁 싸매고 아랫목을 차지했다. 그 탓에 나와 동생은 추운 윗목에서 얇은 이불을 덮고 지냈다. 5학년 때쯤 머리가 굵어지자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할매들은 손주들 위한다고 아랫목을 내주고 이불도 덮어주지 않나. 왜 우리 할매는 자기만 따뜻한 곳을 차지할까. 역시 내가 친손주가 아니라서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미워졌다. 그러던 중 할매가 장롱에서 소중하게 꺼낸 여러 장의 사진들에서 나와 내 동생들은 하나도 없고 외손주들로만 가득 차 있는 광경을 보고는 충격도 받았다.


어느 날 엄마가 아빠 보약 이야기를 하며 이모와 통화하는 것을 들었다. 아빠가 요즘 잠꼬대를 하며 자꾸 가위에 눌린다는 것이었다. 할매가 어린 아빠를 노려보며 때리려고 쫓아오는 꿈을 자꾸 꾼다고 했다. 내 반항심도 커 갔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할매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내 아이들이 줄줄이 있는 형편에서 전처의 아이가 그다지 이쁘지 않을 수 있다. 거기다 남편이 그 아이를 아끼는 경우에는 더할 것이다.


하지만 할매는 너무 어리석게 행동했다. 어른으로서 조금만 마음을 넓게 쓸 수는 없었을까. 꼭 그렇게 모질게 굴었어야 했는지.



<새어머니>


엄마가 돌아가신 그해 음력 12월에 아버지가 옆동네 아낙을 아내를 맞이했다. 열여섯 살 누이도 시집보내야 했고, 일곱 살인 나와 남동생 둘을 보살펴 줄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우리 동네에 드나들던 보따리 장사치(방물장수)를 통해서였다. 정기적으로 마을에 들러 장사하는 방물장수들은 집집마다 숟가락이 몇 개인지, 누가 혼기가 찼는지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았다. 그들은 마을의 친한 집에서 며칠씩 묵으며 먹고 자고 하면서 장사를 했는데, 중매도 많이 했다. 처녀, 총각을 짝지어주는 초혼은 드러내 놓고 했고, 이른바 과부 중매는 비밀리에 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마을마다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장날에 나가 파마를 하고 오면 마을 사람들은 시집가나 보다 짐작을 했다.

새어머니는 과부는 아니었지만 크게 다른 처지는 아니었다. 결혼 후 딸 셋을 낳았는데, 남편이 만주로 떠나버린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거기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만 들려왔다. 이혼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그 시절, 결혼생활에 불만이 있던 남편들이 집을 나가 일본이나 만주로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홀로 남아 살길이 막막했던 새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와 결혼한 것이었다.


나이 든 딸 둘은 시집을 보냈고, 열 살짜리 셋째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나보다 세 살 많은 누나였다.

새어머니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집간 딸들이 차례로 우리 집을 찾아왔다. 맏딸의 전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일제 치하에서 전쟁터로 끌려갔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감감무소식이니 시가에 혼자 살 수가 없어 개가한 자신의 엄마를 찾아온 것이었다. 후에 우리 외숙모가 중매를 해서 재혼을 했다.

둘째 딸은 시가에서 도망나와 우리 집으로 왔다.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시킨 결혼이었다고 들었다. 시가 사람들이 색시 잡으러 왔다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왔다. 아버지가 집안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대책을 논하기도 했다. 둘째 딸은 그렇게 일 년을 우리 집 옆집에서 머물렀다.

그 사이 새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우리 집은 새어머니의 자식들로 북적였다.


나의 두 어린 남동생들은 엄마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손위 누나도 시집을 가면서 나만 남게 되었다. 집안에서 내 위치는 귀한 맏아들에서 천덕꾸러기 전처소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어머니는 나를 늘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런 건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숙제를 하려고 하면 다른 애들은 다 농사를 짓는데 책상 앞에 앉아 꾀를 부린다고 타박을 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숙제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다른 애들은 다 일찍 오는데 너는 뭐 한다고 그렇게 늦게 오냐고 또 구박을 했다. 혹시 친구라도 놀러 오면 굳이 방에서 불러내어 일을 시켰다. 식사 때가 되어도 친구에게 밥 한 술 뜨라는 빈말 한번 건네지 않았다.


나도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새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부를 수가 없었다. 내가 새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아버지가 재혼하신 지 십 년이 지난 후였다. 아버지가 나를 불러 부탁하셨다.

“네 새어머니한테 어머니라고 불러드려라. 그게 모두가 편하고 좋다.”

나는 그 세월 동안 둘 사이에서 표현도 못 하고 속만 끓이고 계셨을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때부터 새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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