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아빠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04

by 빨간머리키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에 가신다. 사 년 전 두 분을 고향의 선산에서 도시의 추모공원으로 이장한 후로 한 주도 빠지지 않은 아빠만의 의식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동생과 함께 내가 태어난 고향마을로 놀러 가 있었다. 내가 대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우리 가족은 고향마을을 떠나 새동네로 이사를 왔다. 차로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당시 나와 내 동생 걸음으로는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겨우 도착해서 삼십 분이나 놀았을까. 친척 오빠가 찾아왔다. 항상 웃는 상이었던 그 오빠의 어두운 표정과 지게를 진 모습이 기억이 난다.

“너희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얼른 집으로 가 봐라.”


나는 한 살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한 시간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던 내내 오후의 어두운 풍경과 알 수 없는 기분에 오래 달리기를 끝낸 직후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집에 도착하니 어른들이 울고 있었다. 어른들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엄마는 눈이 빨갰고, 할매는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아빠는 침통한 표정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 위로 할아버지의 옷 한 벌을 던졌다. 후에 할아버지의 나머지 옷들은 다 태웠다.

엄마가 내게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네 이름을 그렇게 부르셨어. 너를 계속 찾으셨어. 너를 아끼셨어.”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 손주였던 내가 보고 싶으셨나 보다. 정작 나는 울지도 않았고 슬픔으로 가득 찬 집안 분위기가 부대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오히려 장례기간 중 아빠가 당시 새롭게 나온 오백 원짜리 동전을 주며 하루 종일 놀다 오라고 해서 동생들과 신나게 군것질을 했던 기억이 있다. 집에서 장례를 치르던 시절, 상주로 바쁜 아빠, 엄마에게 철없이 귀찮게 구니 아빠가 내린 특단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조용하고 말이 없는 분이셨다. 큰 키에 마른 체격이었으며 수염이 길었다.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고 계셨다. 아침마다 할아버지가 양말 위에 한복 바지를 여미는 띠를 꼼꼼하게 매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여름이면 대나무로 만든 등거리를 입으시고 그 위에 모시한복을 걸쳐 입으셨다. 먼 걸음 외출을 하실 때면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할아버지가 특별히 나를 예뻐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기에 마지막 순간에 나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 나도 놀랐던 것 같다. 그렇게 표현이 크지 않은 분이셨다.


그렇다면 아빠에게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아빠, 할아버지 산소에서 무슨 얘기 하고 오세요?”

“이런저런 가슴에 있는 이야기. 어린 시절에는 몰랐었지. 아버지가 나를 아꼈다는 것을. 그런데 지금 하나하나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애쓰셨고, 얼마나 중하게 생각했는지 그냥 알 수가 있어.”




<아빠의 이야기_나의 아버지>


나는 집성촌(集成村)에서 태어났다. 집성촌이란 문자 그대로 같은 성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우리 동네는 우리 집안사람들과 퇴계 이황의 후손인 진성 이씨 사람들로 구성된 마을이었다. 그 두 성씨가 아닌 마을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증조할아버지는 통정대부(정 3품 이상)였다. 직접 관리로서 복무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명예직이었던 것 같다. 큰 부자였다고 했으니 조선말 경복궁 재건 때 헌금을 많이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집안에 쌀 백석이 들어가는 뒤주가 두세 개가 있었다고 하니 그때까지도 부유한 집안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큰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중심이었다. 그 일대에서 명망 있는 학자였으며, 혼사를 비롯한 모든 대소사를 주관하는 집안의 큰 어른이었다. 전국단위의 문중에서 제사가 있을 때 서열 세 번째 자리에서 제사를 주관할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나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아이들이 큰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웠다. 집안사람들 모두가 큰아버지의 말씀을 따랐고 특히 우리 아버지는 큰아버지 말씀이라면 대꾸 하나 하지 않고 따를 만큼 존경하였다.


아버지는 셋째 아들로 20세기 초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근면 성실한 농부였다. 형제들의 농사를 아버지 혼자 맡아지으면서도 불평이 없었다. 큰아버지댁은 머슴을 들여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아버지가 도맡아서 했다. 둘째 숙부는 젊어서 돌아가셨다. 그 아들인 내 사촌 형님도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려서였다고 한다. 그 집 농사도 아버지가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선한 눈매를 한 온순하고 말이 없는 남자였다. 매일 아침 물을 길어 큰아버지댁에 물독을 채워놓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엄마도 그런 아버지를 따랐다. 무슨 일이 있으면 큰집부터 챙겼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새어머니와 그런 부분에서 맞지 않아 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하셨다.


가세가 기운 상태에서 독립한 아버지는 버리는 것이 없이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길을 가다 쓸모 있는 것을 발견하면 주워 오셨다. 그런 만큼 밥 이외에 간식 같은 건 낭비라고 생각하셨다. 어린 시절 나도 남들처럼 쌀을 튀긴 튀밥, 강정 같은 것이 먹고 싶었지만 어림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인삼을 한 채 사 오셨다. 지금도 인삼은 귀한 약재이지만, 해방 직후 시골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그걸 바짝 말려서 날마다 내 주머니에 조금씩 넣어주셨다. 나는 군것질거리로 하나씩 꺼내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법 없이도 살 양반, 어떤 이는 부처라고도 했다. 비록 배운 것은 많지 않았지만 선한 성품으로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번은 아버지가 장에 나갔다가 친구가 아내 흉을 보는 것을 듣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지 말게. 조강지처하고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줄 아는가.


나는 매주 아버지가 묻힌 곳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을 떠나 낯 모르는 도시로 옮겨와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 매번 다른 이의 손에 부모님의 묘를 맡기는 것보다는 이렇게 자주 찾아뵙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모셔왔다.


산소에 기대어 한 주 동안 생긴 마음의 고민들을 아버지께 털어놓는다. 그러면 아버지가 사느라 애쓴다고 미소 지어 주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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