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장례식이 있어 나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고향에 내려갔다. 이제 고향은 장례 소식이 들려올 때나 가는 그런 곳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온 지 삼십 년도 넘은 데다 고향처럼 우리를 반겨주던 친척 어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는 내려갈 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사람이 떠난 고향에 변함없이 남아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우리 가족이 다닌 초등학교이다. 그 초등학교는 1920년대에 개교한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번에 내려갔을 때 우리는 학교에 갔다. 어릴 적에 뛰어놀았던 운동장은 놀랍게도 여전히 널찍하고 컸다. 내가 작아서 커 보인 줄 알았는데 원래부터 큰 학교였던 것이다. 우리는 학교 관계자의 양해를 구하고 운동장을 한 바퀴 걸어보았다. 코로나로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지만 졸업생인 만큼 사람들이 없는 운동장을 돌아볼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다.
운동장을 걸으며 아빠는 1940년대, 50년대에 학교에 다닌 이야기를 해 주셨다. 약간은 들뜬 목소리였다.
“여기 물 펌프가 있었어. 학교에서 나는 그 물이 좋다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물을 길어가곤 했었어.”
“어느 날은 학교에서 탈지분유를 배급해 줬어. 그런데 그걸 먹을 줄을 몰라서 밥 지을 때 올려서 찌니 돌처럼 딱딱해진 거야. 그걸 깨서 입에 넣고 종일 빨아먹었지.”
“내가 그때 급장이어서 청소 검사를 받는다고 저기 나무 둥치에 회비를 거두어서 넣어놓고는 선생님 사택으로 갔었어. 빨리 검사받으려는 마음에. 돌아와서 봤더니 회비 봉투가 사라진 거야.”
그날 우리 가족은 서로의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을 이야기하며 천천히 운동장을 걸었다.
<아빠의 이야기_열 살 가을에 입학한 국민학교>
1948년 9월, 나는 국민학생이 되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학제는 미군정 체제를 따르고 있어 학년은 9월부터 시작되었다. 보통 아홉 살에 입학을 했으니 한해 늦은 셈이었다. 하지만 열두 살, 열세 살에 입학한 아이들도 있었으니 그리 많이 늦은 편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 전해인 1947년에 입학원서를 냈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동장 격인 구장에게 입학원서를 내면 구장이 그걸 취합하여 학교에 제출했다. 그러면 그 다음날 학교에서 아이들의 면접이 이루어졌다.
면접일 아침에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밭 매러 가자.”
장마 끝에는 풀이 많았다. 그때 콩밭이었는지 목화밭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당장 풀을 매지 않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있을까, 따라가야지. 그렇게 일 년 미루어져서 또래보다 늦게 국민학생이 되었다.
입학식 날, 장사꾼들이 학교 앞으로 몰려왔다. 지금처럼 꽃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간식거리를 팔았다. 9월에 우리 동네에서 나는 유일한 과일, 복숭아가 주요 품목이었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아버지가 복숭아를 사 주셨다. 나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베 문 자리를 보았다. 통통한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벌레 먹은 복숭아 먹으면 잘 생겨진다고 하더라.”
나는 벌레만 빼고 그 복숭아 한 알을 다 먹었다.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이듬해 4월, 나는 2학년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학제가 새로이 적용되었다. 덕분에 나는 1학년을 한 학기만에 마치게 되었다.
학년이 올라간 것은 좋았는데, 교실이 없어서 주로 나무 그늘에서 수업을 해야했다. 그렇다고 다른 반도 교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학생은 많았는데 교사와 학교, 교실은 부족한 형편이었다. 교사가 부족하니 사범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마을에 가르칠 만한 젊은 사람들을 교사로 채용했다. 내가 성인이 된 후 담임선생님을 뵈었는데 교편을 떠나 농사를 짓고 계셨다. 아무래도 그때 우리 선생님이 가장 어리고 힘이 없어서 교실을 배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비 오는 날에는 비를 피해 건물로 들어왔다. 건물에는 들어왔지만 교실이 없으니 신발장 옆에서 수업을 했다. 소풍을 갈 때는 학년별로 같은 장소로 갔다. 하지만 우리 반만 선생님을 따라 다른 장소로 간 적도 있었다. 다른 반 아이들은 같이 모여 놀이도 했는데 우리 반만 그렇지 못해 그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래도 가끔씩은 우리 반도 교실에서 수업을 했다. 다른 반이 체육수업으로 교실을 비우면 우리 반 아이들은 그 빈 교실로 들어가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학생이 늘어나니 한국전쟁 직후에 우리 동네에 국민학교가 신설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학을 가지 않고 집에서 먼 우리 학교로 계속 다녔다. 선생님께서 우리 동네 신설 학교로 부임하셔서 가끔씩 등굣길에 선생님을 뵈면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리곤 했다.
이후에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 우리 반 학생이 선생님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인연이 이어져 선생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에 붙잡혔는데 포로교환으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나도 당시 엄마가 돌아가신 이야기 등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