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사라진 밤

아빠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06

by 빨간머리키키

아빠와 매주 인터뷰를 진행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역사책으로 배웠던 광복과 미군정, 정신대 같은 낱말들이 아빠의 어린 시절에 등장하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시대의 포레스트 검프가 아닐까. 보통사람들의 삶이라도, 아니 보통사람의 삶이라서 시대가 더 잘 반영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빠의 한국전쟁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다.

“아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빠는 몇 살이었어요?”

“그때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었으니까 열두 살이었지.”

아빠는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그럼,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났으니까 1학기 못 마치고 바로 피난 가셨겠네요?”

“아니. 우리는 전쟁 났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일상은 유지하고 있었어. 피난은 1학기 마치고 여름방학 무렵에 갔었지.”


내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내가 떠올린 한국전쟁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온 나라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당장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마을이 평온했다는 건 아니야.”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는 피난길 못지않은 비극이었다.




<아빠의 이야기_청년들이 사라진 마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이면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아버지도 일정대로 모심기를 끝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리 동네 하늘에 제트기가 날아다녔다는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제트기를 ‘호주’ 기라고 불렀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우리 정부에 지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고 오스트리아는 참전은 물론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끝까지 호주기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방학 즈음으로 무척 더운 계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동네 청년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집집마다 아들이, 손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했다. 점심 먹을 때면 돌아오겠지, 젊은 애들끼리 무슨 장난을 치나보다 위안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사라진 이들의 공통점은 전날 밤 마을 뒷산 바위에 모여서 놀았다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 뒷산에는 널찍하고 편편한 큰 바위가 있었는데 청년들의 아지트였다. 놀거리가 특별히 없던 시절, 젊은이들은 저녁을 먹고 나면 으레 그 바위로 모여 시간을 보냈다. 비올 때 입는 도롱이를 입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배도 피우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 파출소에서 순사가 구장(동장)과 함께 뒷산 바위로 찾아왔다. 이웃마을에 비행기가 한 대 추락했는데 지원인력이 부족하니 청년들이 가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서에 트럭을 대기해 놓았으니 거기까지 가서 트럭을 타고 이동하자고 했다. 우리 동네에서 지서까지는 10리 길이 넘었다. 청년들은 비행기를 구조하기 위해 그밤에 지서까지 걸어갔다. 지서에는 순사의 말대로 트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들은 트럭을 탔고, 그 트럭은 곧장 대구의 수창 국민학교로 내달렸다. 수창 국민학교는 당시 신병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일주일 정도 제식훈련을 받고 총 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청년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이는 살아 돌아온 두 명의 젊은이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날 밤 사라진 청년들 중 단 두 명만이 돌아왔다.


그중 한 명은 우리 앞집에 사는 형님이었다. 그 형님은 한문으로 글씨를 쓸 줄 알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름 지식인이었다. 덕분에 그는 중대의 서무로 발탁되어 전쟁터에 직접 투입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은 참으로 운 좋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여러 번의 전투 끝에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모두 한 곳에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출동하기 위해 군모를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군모가 보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아무 군모나 눈에 띄는 대로 집어 썼다. 뒤늦게 헐레벌떡 뛰어갔더니 서무를 보는 군인이 자신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가 쓴 군모는 중사 계급의 것이었다.

그때는 부대를 재편성하는 중이었다. 북한군에게 밀려 부대마다 사상자가 많아 생존자 위주로 부대를 다시 편성했다. 그렇게 그는 중사가 되었고, 직접적인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일반 사병과 달리 휴가나 외출시 집에 다녀갔다. 그때마다 총을 갖고 나와 마을에서 총 연습을 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우리동네에서 살아남은 청년들은 전쟁에서 살아온 두 명과 그날밤 밤마실을 가지 않은 이들이 전부였다. 그 중 내 사촌인 N형님도 있었다. 형님은 그날 농사일이 너무 고되어 마당에 펴 놓은 멍석에 잠깐 눕는다는 것이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들이 징집을 하러 올 것을 미리 알았을 거라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K가 훈련방위대의 간부였었는데 정보를 자신의 학교 동창들에게 미리 알렸을 거라는 거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많은 청년들이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시대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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