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기다려 피난길에 오르다

아버지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07

by 빨간머리키키

나는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예부에 가입했다.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하자 아빠가 어른 손바닥만 한 작은 벼루를 내주셨다. 다른 아이들은 큰 새 벼루를 가져오는데 나만 오래된 작은 벼루를 갖고 가려니 부끄러웠다.

“엄마, 나도 벼루 새 걸로 사 줘.”

“이 벼루는 아빠가 피난 갈 때도 가져갔다가 다시 가져오신 거야. 소중한 거란다.”

엄마는 투정하는 나를 달랬다. 그래도 나는 속이 상했다. 그렇게까지 오래된 벼루인 줄 몰랐는데 1950년 이전에 만들어진 구식 벼루라니. 철없는 마음에 그 벼루를 하루빨리 닳게 만들어 새 벼루로 바꾸고 싶었다. 먹을 갈 때마다 벼루의 한가운데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빨리 파이게 한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벼루는 어찌나 단단한지 아무리 먹을 갈아도 소용이 없었다. 꼬박 일 년이 지나서야 새 벼루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오래된 벼루는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아빠에게 듣는 한국전쟁 이야기는 뭔가 아빠를 다시 보게 한다. 말로만 듣던 전쟁 이야기에 어린 아빠와, 나를 귀여워해 주셨던 친척 아제들, 아지매들이 등장한다.

그래, 그런 세월을 보내셨구나. 그러고 나서 또 21세기를 살아내시는구나. 고단하시겠다.


“아빠, 피난은 언제 가신 거예요? 그때 벼루도 가져가셨다면서요?”

“국군이 계속 밀릴 때 갔지. 동네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몰살되었을 무렵, 그 무렵이었어. 여름방학 때였어.”


<아빠의 이야기_피난길 1>


서울이 점령되고 국군은 계속 남쪽으로 밀렸다. 우리 집이 피난을 떠난 것은 우리 동네 청년들이 끌려간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이었다. 우리 동네라고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피난을 지휘한 분은 역시 큰아버지였다. 피난길의 목적지는 대구였다.

우리 집안은 두 무리로 꾸려 각기 다른 길로 떠나기로 했다. 한꺼번에 같이 가다가 행여나 잘못되면 가문이 통째로 없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큰아버지네 자제들과 막내 숙부네가 같이 떠나고, 우리 가족과 둘째 숙부네가 같이 떠나기로 했다.


큰아버지 내외는 피난을 떠나지 않기로 하셨다.

“아무리 인민군이라도 우리같이 늙은이들을 어찌하겠나.”


큰아버지는 대구까지 가는 길에 우리 가족들이 만나서 신세를 질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 가는 경로를 하나하나 다 적어주셨다.


날짜가 정해지자 짐을 꾸렸다. 아버지는 양식과 가재도구를 소달구지에 실으셨다. 나는 교과서 전부와 벼루 등으로 내 보따리를 꾸렸다. 어딜 가든 학교는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피난길에서 돌아왔을 때 교과서를 다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마음이 급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다급해진 이는 N사촌형님이었다. 형님은 그 해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신부는 자신의 본가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풍속으로는 봄에 식을 올리고 가을에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신부와 영영 헤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형님은 부랴부랴 처가에 연락을 넣어 피난길의 한 장소를 신부에게 알려주고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형님의 또 다른 골칫거리는 돼지였다. 형님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가을에 신부를 데려올 때 동네잔치에 쓸 요량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떠나는 피난길에 천방지축 돼지를 끌고 가기도 어려웠고, 집에 두고 가면 인민군들이 잡아먹을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형님은 애지중지 키운 돼지를 잡기로 했다. 피난을 떠나기로 한 그날 낮에 형님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돼지고기를 대접했다. 나도 그날 한 접시 얻어먹었는데 하루 종일 설사를 해서 혼이 났다. 갑자기 기름기 도는 돼지고기가 들어가니 속이 놀란 탓이었다.


나는 설사로 홀쭉해진 배를 움켜잡고 등에는 책보따리를 지고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낮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니 밤길에 군인들의 눈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다고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다.


드디어 자정이 되었다. 우리 집안은 두 무리로 나뉘어 피난길에 나섰다. 살아서 만나자고 서로 다짐을 했다. 우리의 피난길을 큰아버지 내외가 배웅을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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