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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 Apr 01. 2022

고등학교 3학년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 5

고등학교 3학년. 실용음악 입시를 포기한 게 나뿐이 아니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우리 반은 예체능 반이었지만 예체능 계열 진학을 포기한 인원도 여럿 됐다.


내가 실용음악과 진학을 포기한 데엔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 복잡한 이유들은 나를 갉아먹었다. 아빠의 실직. 집안 경제의 붕괴. 꼭 실용음악과에 가지 않아도 아이돌은 될 수 있으니까. 진학을 포기했다고 속이 편한 건 아니었다. 괴로웠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음악이었지만, 내가 잘하는 건 역사였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내내 근현대사 과목 1등급, 전교 1등이었다. 유일하게 잘하고 관심이 있는 과목이었다. 단지 그 이유로 사학과를 준비했다.


내게 좀 더 입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가 있었다면 사학과뿐 아니라 역사 관련한 모든 전공에 대해 지원했을 텐데. 나는 그 정도의 지식도 없었다. 학원도 다니지 못했으니 정보를 얻을 기회도 없었다. 논술이나 다른 방법으로 진학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 당시엔 학원을 못 다니니 엄두도 못 냈다. 스마트폰이 활성화되어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집에 돈이 없으니 인터넷은 매번 끊겼다.


내가 우울에 빠진 건 정말 복잡한 이유였다. 아빠는 직장을 그만둔 후 또 술로 매일을 보냈다. 매일 하교하면 술에 취한 채 방에 누워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봐야 했다. 나는 당장 입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데. 주변 친구들은 학원에 과외에 매일을 분주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이렇게 막연하게 수능 공부만 해도 되는 건지. 나는 이제 곧 졸업하고 성인이 되지만 내 동생은 아직 중학생인데. 온갖 죄책감과 열등감, 채무감이 우울로 발전했다.


그 쯤 학교에서 고3을 대상으로 우울 검사를 진행했다. 심리학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학교로 찾아와 검사를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검사 결과 우울이 높게 나온 학생들은 따로 상담도 진행했다. 사실 이 때는 내가 우울하다는 생각은 별로 가지지 못했다. 항상 죽고 싶었고 삶이 끔찍했고 막막함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내가 우울증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울검사에서 초기 우울증 의심이라는 결과를 받았을 때, 솔직히 믿지 못했다. 내가 우울증이라고? 뛰어내리고 싶긴 했지만, 목매달아 죽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우울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결과가 나온 후 상담실로 불려 가서 상담을 받았다. 무슨 상담을 받았는지 하나하나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질문 하나만큼은 기억한다. “꿈이 뭐예요?” 나는 답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에요.” 뭐. 아이돌이 되는 게 내 사명이고 꿈이었지만,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면 내성적인 내가 아이돌을 꿈꿨을 리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럼 평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의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평범한 아파트에서 살고 아빠가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내 방이 있는 거요.”


사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최대한 덤덤하게 글을 적고 있지만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가득하다.


상담 선생님은 지속적인 상담을 권하셨다. 글쎄. 그 당시 나의 상태를 정확하겐 모르겠지만 상담이 필요한 상황이긴 했던 모양이다. 하교한 후 엄마에게 상담 이야기를 했다. 추가 상담은 학교 밖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의가 필요했는데, 엄마는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렇게 기회 하나가 지나갔다.


참 이상한 게, 그 이후부터 점점 심해졌다. 점점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고, 매일 매 순간 울었다. 저녁에는 가족들이 다 집에 있으니 울 장소가 없어서 허벅지를 주먹으로 쾅쾅 치며 괴로움을 참곤 했다. 아빠와 싸울 때마다 죽고 싶었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치 못해 내 몸을 때리고 꼬집고 할퀴었다.


이러다간 수능 보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매일 머리가 아팠고 숨이 막혔다. 찾아보니 정신건강복지센터라는 곳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 엄마한테 말했다. “구청 근처에 있는 센터에서 무료로 상담을 해준대. 상담을 받아보고 싶어.” 엄마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런데 가서 정신 상담받으면 기록이 남을 수도 있어. 안 갔으면 좋겠는데.”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과 우울을 내 안에 삼켰다. 나는 썩어갔다. 살아있는 송장처럼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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