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백하다>, 알프레드 히치콕
결자해지: 한 때 업계를 놀라게 한 전설적인 도둑 ‘고양이’ 존 로비는 어느덧 은퇴한 지도 15년이 지나 프랑스의 한 시골에서 늘그막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그의 수법을 똑같이 모방한 도둑이 등장하고,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경찰과 지난 날의 동료들에게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하는 위기에 놓인다.
존 로비는 여타 잡범들과는 달리 자신의 범죄를 변명하거나 미화할 의도는 전혀 없는 듯하다. 부자들의 보물을 훔쳐 빈자에게 돌려준 로빈 후드가 아니냐며 띄워주는 휴스에게 자신을 위해 훔친 거라며 담담히 일소하고, 올리버 트위스트 식의 불우한 가정사도 없었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그는 비열한 인물인가? 글쎄, 케리 그랜트를 얼굴로 내세운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방범을 좇는 것은 단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그를 곤란에 몰아넣는 것은 본인이 아닌 주변 인물들의 시선이다.
그의 주변 인물을 두 가지로 나눠보면, 한 쪽은 프란시와 다니엘이고 다른 한 쪽은 경찰과 로비의 레지스탕스 동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를 위선자, 악당으로 보는 쪽은 로비와 똑같은 과거를 가진 전 동료들이라는 점이다. 정작 그의 먹잇감이나 다름없는 프란시는 로비를 마치 로맨틱한 영화 속 괴도처럼 동경하고 있고, 다니엘은 로비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에 빠져있다.
중립적인 관객(혹은 케리 그랜트의 매력에 이미 매혹당한-)으로서 보건대 로비는 위선자도 위악자도 아니다. 그는 이미 레지스탕스로서 자신의 형기를 마쳤다.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할 지도 모르지만, 엄밀히 로비는 법적으로만 면죄됐을 뿐 도덕적으로까지 면죄된 것은 아니다.
악당들이야 그를 어찌보건 알 바 아니지만 사회인으로서의 입지가 위협받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제와서 그의 호화로운 빌라를 포기할 수도 없고 프란시에게 하지 않은 일로 비난 받는 것도 싫다. 당당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자니 경찰이 잠자코 들어줄 리도 없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발로 뛰고 자신의 손으로 가짜 고양이를 잡아야만 한다.
잠깐 한 길 벗어나 프란시를 살펴보자. 그녀는 낯선 남자와는 말도 섞지 않는 요조숙녀처럼 점잔 빼다가도, 로비와 단 둘이 남게되자 곧장 입술로 돌진하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이어지는 로비와의 관계에서도 항상 주동자로서의 역할을 놓지 않으려 한다. 범죄의 거장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추격전을 보라. 그러나 그녀의 모험은 어머니의 목걸이가 도난 받는 순간 끝난다. 끊임없이 로비에게 자백을 추궁하고, 알면서 하룻밤을 보냈으면서도 정작 그 백일몽이 현실에 마수를 뻗치자 선량하고 순진한 시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재미가 없을 때까지만 재미있다.
같은 종류의 이중성을 다른 인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버타니, 후일 다니엘을 사주한 진범으로 밝혀지는 그는 앞으로는 절친의 앞날을 기원하고 보호하려는 듯하지만 정작 뒤에서는 로비의 과거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한다. 다니엘은 로비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영웅시하면서도 정작 그의 수법을 모방하여 궁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그림자 군단’ 동료들은 애초부터 로비의 호의호식이 꼴보기 싫었고, 경찰은 기존의 결론을 뒤집고 진범을 좇을 의지조차 없다.
그런고로 영화를 지배하는 거대한 힘은 사회의 부동성이다. 로비의 결자해지 역시도, 도덕적인 구원 따위가 아니라 길가에 남은 자신의 발자국(혹은 그의 수법, ‘고양이’ 그 자체)을 지우려는, 거국적인 완전범죄에 불과하다. 영화를 통틀어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는데, 다름아닌 프란시의 어머니 스테이시 여사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땅으로 졸부가 된 여인으로, ‘남의 돈으로 부자가 된’ 인물이다. 로비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도둑이 아니던가? 로비가 유력 용의자임을 알면서도 그의 도주를 묵인해주는 것은- 동업자간의 예의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퉁이 가게>, 에른스트 루비치
이 작고 사랑스러운 영세 가게 이야기에서 악당이라 부를만한 것은 거의 없다. 아마 있다면 바다쉬일 것이다. 순진한 사장의 아내와 바람을 피고, 직원 사이에서 가십을 재생산하는 속물이니까. 동화 속의 악당은 그에게 머물지만, 사실 그가 투사하는 악은 그보다 더 크다.
영화의 중심은 크랄릭과 노박의 이중 애정 전선이다. 익명으로 편지를 나누며 펜팔이 된 그들은 서로를 향해 감당할 수 없는 환상을 쌓아간다. ‘언제쯤 이 담이 무너질까’하는 서스펜스가 영화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다. 편지 속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어 더 없이 이상적인 존재다. 그들은 절대 취업난에 시달리지 않고, 톨스토이를 읽으며, -아마- 외모도 선남선녀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이 위태로운 환상을 처음으로 직시하는 사람은 크랄릭이다. 상상 속 여신이 밉상 부하직원이라는 사실은 깨나 충격적이지만, 그는 내심 노박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 속에 있는 남자는 크랄릭이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상사병으로 앓아누운 노박은 크랄릭에게 그가 보낸 편지를 읽어주며 그 미사여구에 흠뻑 젖는다.
“그저 사모님과 식사를 했다고 말했을 뿐인데 왜 그리 과장하시오?”. 영화의 첫 장면, 크랄릭이 바다쉬를 쏘아붙이며 한 말이다. 그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지 않고 부풀리는 침소봉대라는 점에서, 크랄릭의 편지 속 화려한 수사들과 바다쉬의 가십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십은 실제와 다른 환상을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 불신을 낳는다. 당장 마터체크가 크랄릭을 해고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두 차례 크랄릭이 노박에게 감탄하는 장면이 있다. 자못 시적인 표현으로 그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얼마나 별난 사람인지 힐난할 때이다. 크랄릭은 예의 냉소조차 접어두고 그녀의 표현력에 감탄한다(Nicely put). 그 문장들이 가십과 다른 무게를 가지는 이유는 그 내용에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 크랄릭은 마침내 ‘그 남자’를 만날 생각에 잔뜩 신난 노박에게 신랄한 현실을 쏟아붓는다. ‘내가 그 남자를 봤는데, 얼굴도 별로고, 뚱뚱하고, 당신 돈에 빌붙어먹으려는 한심한 남자더라.’ 못된 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도 아니다. 그러나 가십을 가십으로 해소시키는 게 그리 큰 죄일 것 같지는 않다. 이제 환상은 모두 끝났고, 남은 건 진심의 전달 뿐. 그렇게 이 샤레이드 로맨스의 종합은, 어떤 눈속임도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그가 안짱다리라는 시시한 소문의 시시한 진상을 확인하며 이루어진다.
<빅 히트>, 프리츠 랑
사실, 정당방위라는 게 미디어에서 너무 남용되는 감도 없지 않다. 마치 총구가 한 번 겨눠진 주인공은 그 이후엔 누구를 얼마나 죽이든 상관없다는 투다. 전직 형사가 자신의 노하우를 십분 활용해 일개 갱단을 전부 쓸어버리고, 대충 죽은 아내의 살랑거리는 인서트들로 얼렁뚱땅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것이 단순히 어느 편에 들었느냐의 문제여서는 안된다. 선한 자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어야한다. <빅 히트>의 연민과 공감처럼.
배니언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더 강하게 눈길을 쓰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데비다. 데비가 겪는 천로역정에 비하면 배니언의 그것은 사소한 일탈처럼 보일 정도다. 멜로드라마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연기를 보라. 배니언은 두 가정(하나가 아니다)의 파괴범인 던칸 여사에게 복수할 깜냥도 없지만, 데비는 자신의 복수에 던칸까지 덤으로 얹어서 보내버린다. 얼굴의 화상을 보는 것이 두려워 호텔 방의 전등조차 키지 못했으나, 최후의 순간 영화의 가장 강한 조명은 그녀 얼굴의 성한 면만을 비춘다.
‘모든 사람이 다 나쁜 건 아니야’라는 말이 염세론보다 더 용감하게 들릴 때가 있다. 배니언에게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가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로 마음 먹었을 때가 아니었던가. 다만 너무 이르게 등장해 화를 입어야만 했던 루시 채프먼에게 묵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