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4km ⑧] 넘어진 자리가 단단한 땅이었다

by 희원

재입사, 그것은 단번에 5년여의 허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걸까. 인생을 통틀어 신입사원 아닌 신입사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때가 가장 신나고 뿌듯했다. 이보다 더 값지고 안온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만사가 순탄했다. 일주일 내내 아이들과 함께해도 좋을 만큼 의기충천했다. 그 설렘이 너무 커서, 나는 그것이 열정인 줄로만 알았다. 실은 현실의 무게를 외면한 채 앞만 보고 가려했던 오만한 욕심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공포 영화의 오프닝은 늘 어떤가. 비극이 닥치기 전, 세상은 유난히 고요하고 풍경은 온통 장밋빛이지 않던가. 나 또한 그랬다. 마치 영화 <새벽이 올 때까지>의 한 장면처럼, 곧 닥쳐올 긴 밤의 시련을 예고하는 찬란한 폭풍전야였다.


새 지역을 배정받고 아이들과 눈을 맞춘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 예기치 못한 바람이 불어왔다. 신학기라는 계절 앞의 특성상 아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속절없이 빈자리를 지켜보는 내내 가슴은 터질 듯 저며왔고, 그 허무함은 피범벅이 된 듯 아프게 온몸을 파고들었다.


타인의 슬픔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는 쉽게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정작 내 삶의 비탈길에서는 좀체 눈물을 허락하지 않던 나였다. 그런 내가 텅 빈 차 안에서 낯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펑펑 쏟아지는 통곡은 아니었으나, 가슴이 미어터지는 통증이 밀려왔다. 순리를 거스른 탓이라며 나를 자책하고, 애꿎은 동료를 원망하는 사이 우울의 늪은 소리 없이 깊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지독한 감기는 폐렴 정밀 검사까지 받게 했다. 다행히 폐렴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원장님이 큰 병원 소견서까지 써줄 정도로 내 몸은 이미 기력이 다해 있었다.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한 넝마가 되어 있었다.


동료 교사들은 자기도 그 시기엔 그랬다며 나를 격려해 주었고, 관리자분들은 다 지나갈 일이라며 무너진 마음을 다독여 주셨다. 그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마음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그렇게 상처를 회복하며 새로운 관리 지역을 배정받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신바람을 내려 애쓰던 그때, 정작 진짜 복병은 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발을 들여놓은 낯선 아파트 단지. 정해진 수업 시간표에 맞추느라 서두르던 발걸음이 툭 불거진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버텼지만, 비틀거리다 이내 중심을 잃고 차가운 보도블록 바닥 위로 '꽈당' 하고 고꾸라졌다.


그 순간 내 몸을 감싼 건 통증보다 더한 공포였다. 간신히 일어섰는데, 다시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 그 불길한 징조는 틀리지 않았다. 며칠 뒤 병원에서 받은 진단명은 '견열골절'이라는 날벼락이었다. 완치까지는 적어도 반년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라 했다. 하지만 삶에 들이닥친 숱한 고비들에 이골이 난 나는 이깟 부상 하나에 멈춰 서 있을 정도로 부실하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사고와 잔병치레는 지국을 넘어 타지국까지 소문이 났고, 새로 부임한 사업국장님조차 안부를 물을 정도였지만 나는 거추장스러운 목발을 내팽개치고 대신 편안한 슬리퍼를 택했다. 부러진 뼈의 통증은 시간이 해결해 줄 몫이었기에, 나는 그저 다시 넘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걸을 때마다 통증이 머리끝까지 아릿하게 올라왔지만, 한동안 절뚝거리며 기어이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이 집 저 집, 하나같이 손을 맞잡으며 걱정해 주시는 부모님과 아이들을 보며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걷는 이 길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사그라들 줄 모르는 나의 의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몸의 고통보다 무서운 건 내 믿음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었던 제한된 환경이었다. 재입사 불과 두 달 전, 세례를 받으며 얻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안의 시간. 그 소중한 일요 미사마저 포기해야 했을 때 내 안의 심지는 쑥 빠져나간 듯 헛헛했다. 2층 성당 계단을 오르내리기엔 신체적 제약이 뒤따랐고, 남편의 강한 만류 앞에 나는 무력했다. "과연 이 길이 맞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모든 걸 내려놓고 싶던 순간, 선뜻 동료가 손을 내밀었다.


“어머, 선생님. 제가 교재 미리 다 넣어드릴게요. 조심해서 다니세요.”


고통은 혼자 감내할 수 있을지라도, 물리적인 장벽은 혼자 넘을 수 없었다. 내 힘으론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대신 잡아주는 손길 덕분에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수시로 다리는 좀 어떠냐며 “좋은 일을 앞두고 겪는 액땜이라 생각해요”라고 건네는 말 한마디의 위력은, 불편한 다리를 오히려 여유롭게 여길 정도로 따뜻했다.


그동안 “정신적 고통이 문제지, 육체적 고통이 무슨 대수냐”며 치부해 왔던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피폐해지는 건 순식간이었고, 누구와도 이 고통을 공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포기’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절실할 때는 그 무엇보다도 솔직한 배려와 응원만이 구원의 빛이 돼 주었다.


회복의 길은 끝까지 나를 시험했다. 사고 두 달째, 이제 계단을 올라도 된다는 말에 그 길로 한 시간가량 걷던 날, 처음보다 더 부어오른 발을 보며 "나는 안 되는 걸까" 지레 겁을 먹고 다시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엑스레이를 짚어가며 "아주 잘 붙고 있다"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모든 불안은 내가 세운 '지레짐작'이라는 마음의 벽이었던 것이다. 그러게, 새벽이 오려고 그토록, 그토록 어두운 밤이 길었던 걸까. 비로소 나의 지난했던 긴 밤이 끝났다.


돌이켜보니 벌써 작년의 이야기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슬리퍼를 끌며 절뚝거리지 않는다. 단단하게 끈을 묶은 운동화를 신고, 웬만한 4, 5층 계단쯤은 운동 삼아 가뿐하게 뛰어오르며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비극을 예고했다면, 오늘의 경쾌한 발걸음은 시련을 정면으로 통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의연함이다.


시련은 나를 부러뜨리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단단한 땅을 딛고 서 있는지 확인시켜 주러 온 손님이었다. 오늘도 나는 그 이정표 같은 기억을 딛고, 아이들의 환한 미소를 향해 경쾌하게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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