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부축 없이 마주한 내 안의 정직함
경막 외 출혈 수술 후 3년, 간신히 회복해 웹디자인 학교에 발을 들인 지 보름 만이었다.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왔다. 장폐색 수술. 그렇게 또다시 시작된 투병 시간이 어느덧 9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그날, 나는 마침내 계단 난간에서 두 손을 떼고 오로지 내 두 다리의 힘만으로 18층 꼭대기까지 올랐다. 난간을 생명줄처럼 붙잡고 헐떡이던 지난날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람의 의식은 한 번 시련을 겪으면 무섭게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어린 코끼리를 묶어두었던 가느다란 밧줄이 평생의 사슬이 되어버리듯, 한 번 난간에 의지하기 시작하면 평생 그 쇠붙이를 놓지 못할 것만 같은 공포에 갇히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몸의 세포는 1초에 수천 개씩 새로 태어나고, 70일이면 온몸이 새롭게 세팅된다고 하지 않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단을 오른 지 넉 달째, 비로소 나는 내 몸이 완전히 재탄생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몸이 좋아졌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좀처럼 늘지 않던 체중이 정상 궤도로 진입했고, 무엇보다 ‘입맛’이 좋았다. 예전에는 좋아하는 과일 한두 조각에도 금세 배가 불렀는데, 이젠 갓 지은 밥에 신김치 하나면 밥 한 그릇을 비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소화력이 곧 활력이요, 활력이 곧 삶의 의지라는 당연한 진리를 몸소 깨달았다.
사실 이 회복의 과정 뒤에는 나만의 치열한 사투가 있었다. 처방 약이 몸에 맞지 않아 밤을 지새우며 몸과 마음고생 끝에, 나는 스스로 영양학을 공부하며 몸을 돌보기에 이르렀다. 비타민 C에 대한 편견을 깨고 ‘메가도스’를 실천하며 소화력을 되살렸고, 비타민 B와 마그네슘으로 무너진 균형을 붙잡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내가 의지한 것은 타인의 조언이 아닌 나만의 확신이었다. 그 시간은 단순히 건강을 되찾는 과정이 아니라, 오직 나만의 신념 하나만을 믿고 따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확실하게 회복하고 있는 와중에도 문득문득 의문이 생겼다. 매일 빠짐없이 계단을 오르는데, 어쩜 단 한 번도 버겁지 않은 적이 없을까. 지하에서 18층까지 8분 걸리던 시간이 7분대로 단축되었을 뿐, 미치도록 고통스러운 것은 늘 한결같았다. 그럴 때마다 계단 창밖으로 무거운 회색 바윗덩이를 짊어진 채 묵묵히 올라가는, 잘 짜인 근육질의 시지프스와 함께 있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그 숭고한 형상에 실로 경탄이 쏟아졌다. 때로는 두 시간 남짓 산책을 하고 계단을 오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이상하리만치 오히려 더 발걸음이 가벼워져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결국 궁극에는 또다시 숨이 차고 땀이 맺히는 매한가지의 버거움 앞에서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이 반복되는 치열함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시지프스'였다. 거대한 바위를 어깨에 받쳐 들고 산꼭대기까지 올리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는 그.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다시 어깨를 들이미는 그의 형벌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무한 반복의 ‘오늘’과 닮아 있었다.
삶이 힘겹다고 주저앉지 않고 꿋꿋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들이다. 어제 18층에 도달했다고 해서 오늘의 계단 오르기가 만만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19층, 20층까지 계속 오를 수 있는 지구력이 생긴 것만은 확실했다. 조금 욕심을 내어 옥상까지 더 천천히, 혹은 일정한 템포로 나아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시지프스의 위대함은 바위를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매일 반복적으로 힘겨운 무게를 견디며 다시 시작하는 '의지'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난간에 단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은 채 뚜벅뚜벅 18층까지 걸어 올라온 지 그날로 삼 일째였다. 숨은 가빴지만 심장은 어느 때보다 힘차게 뛰었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오직 자신만이 아는 우직한 길을 믿고, 그 길 위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는 신념 그 자체다.
이제 나는 난간 없이도 충분히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내 두 다리가 기억하는 이 단단한 성취와, 매일 기꺼이 감내하는 이 '정직한 버거움'이 앞으로의 내 삶도 든든히 지탱해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말]
3년 전의 수술과 또다시 뒤따랐던 시련을 지나며 깨달은 것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건 타인의 부축이 아니라 내 안의 정직함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난간을 놓는 순간 비로소 나 자신을 믿게 되었고, 매일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삶의 치열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바위를 밀어 올리고 있을 모든 시지프스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