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도착한 호텔은 썰렁하고 낡아 보인다. 3월 초, 이국 땅 첫 호텔의 널찍한 공간이 더 서늘하게 느껴졌나 보다.
간단한 콘티넨탈 조식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일단 빵이 담백하고 맛있다. 슬라이스 치즈와 햄, 시리얼과 우유, 주스와 커피 등 음료수, 여러 종류의 잼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다.
돌아올 때,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얻은 결론, 조식은 그나마 이곳이 제일 푸짐했다는.
8일간 우리와 동행할 전용버스(2018년 신형)
일행은 로마 일주를 위해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 전세버스에 오른다. 어제저녁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로마로 향한다. 되돌아가는 길이 덜 낯설었는지, 로마 근교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푸근해 보인다.
로마 근교 목가적 전원풍경
전세버스에서 내려, 개선문과 콜로세움 쪽으로 걸어가는 길, 애니메이션
로마는 도시 전체가 길고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콘스탄티노 개선문'과 유명한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이 웅장한 형체를 드러낸다. 언젠가 꼭 오고 싶었던 곳에서 위대한 인류 고대문화유산을 마주하니 가슴이 설렌다.
콘스탄티노 개선문 (Arco di Costantino)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서로마제국을 통합했다. 곧이어 동로마 지역을 공격, 324년에는 로마 전역을 지배한다. 이 콘스탄티노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서로마 통일을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이다.
콘스탄티노 개선문 정면과 오른쪽 콜로세움
주주와 레드루는 책과 영화에서 보았던 역사적인 장소에 섰다.
이 개선문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영광과 업적이 다양한 부조로 장식되어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승리, 로마 입성, 베로나 포위 등 황제의 위대한 업적이 영원할 것처럼 단단하고 찬란하게 빛난다.
로마에는 3대 개선문이 있다. 81년 세워진 티투스 개선문, 315년에 세워진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23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다. 이들 개선문은 서로 멀리 않은 거리에 있다.
모두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건축물들이니, 로마야말로 참으로 오랜 세월 승리를 거듭해 왔다. 승자로 군림했던 로마인들의 찬란한 유적지가 아침 햇살 아래 눈부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뒷면
며칠 전 뉴스에서 보았던 우리 '삼일절' 자축 영상이 머릿속을 맴돈다. 휘날리던 태극기, 자랑스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우리 '독립문'이 오버랩된다.
우리 독립문은 승리를 기념하는 곳이 아니다. 대한제국기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한 특별하고 귀한 문이다.
승자들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지켜온 우리 유구한 역사가 새삼 눈물겹도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로마에서의 아침이다.
우리 모녀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고대 로마 유적지를 바라보며, 자랑스럽지만 아픈 지난한 우리 역사까지 온몸으로 쓸어 담고 있다. 최근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는 회색 빛 서울 하늘이, 오늘 로마의 푸른 하늘과 대조를 이루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콜로세움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한 공간에서 바라볼 수 있어 더 조화롭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바로 앞에 콜로세움이 있고, 개선문 후면을 바라보고 서서,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금 떨어진 곳에 팔라티노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길 끝에 티투스 개선문이 승리에 취한 듯 우뚝 서 있다.
티투스 개선문 (Arco di Tito)
티투스 개선문 너머로 포로 로마노가 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h of Septimius Severus)도 나타난다. 티투스 개선문은 서기 81년 티투스 사망 직후,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건설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팔라티노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옛 신전 터 돌길 사이로 티투스 개선문이 보인다.
티투스 개선문 (Arco di Tito)
티투스 개선문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승리한 로마 황제 티투스를 칭송하고,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개선문은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개선문의 모태이다.
우리는 포로 로마노까지 직접 걸어가는 대신,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향하는 길에서 그 전망을 한눈에 내려다볼 예정이다.
팔라티노 언덕은 오늘 하루 로마를 둘러보아야 하는 엄청난 스케줄 때문에 아쉬운 추억 속 담아둔다. 잠시 후, 우리는 대전차 경기장과 진실의 입을 둘러보고 캄피돌리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포로 로마노를 통과하면서, 팔라티노 언덕을 지나쳐 갈 것이다.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Colosseo)
거대한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이다. 우리에게 콜로세움은 역사적 배경보다 먼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유명한 검투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콜로세움은 약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바깥 둘레 527m, 높이 57m에 이른다. 웅장한 콜로세움 외벽은 아래층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원기둥이 80개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건축물 일지 상상만 해도 움찔한다.
레드루가 광각 카메라로 찍은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연 인원 4만여 명을 투입시켜 80년에 완성한 원형 경기장(Flavia Amphithetre)이다.
이곳에는 네로 황제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에서 내려다보이던 인공 연못이었다. 흙으로 메꿔 기반을 다지고 이런 거대한 경기장을 건설한 것이다. 2000여 년 세월 동안 지진과 수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아직도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니, 고대 로마의 뛰어난 건축 기술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견고한지 놀라울 뿐이다.
콜로세움에 내리는 로마의 햇살, 로마시대에도 같은 태양이 빛났겠지!
이 위대한 건축물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며 업적이지만, 이곳도 승자의 역사 유물이다.
전쟁 포로였던 수많은 검투사,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은 물론 동물들까지 동원된 피로 얼룩진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주주와 레드루에게 내리는 로마의 눈부신 햇살
관광객을 위해 대기 중인 마차들
로마 지하철이 가까이 있는 쪽에서 찍은 콜로세움
콜로세움 경기장 안으로 통하는 문
이곳에서는 전쟁 포로 중 선발된 글래디에이터(Gladiator, 검투사)와 맹수가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전투 경기가 벌어졌고 황제와 로마 사람들은 이를 보며 즐겼다. 당시 검투 장면은 오늘날 프로 스포츠처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 잔혹한 경기는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중단될 때까지 계속됐다.
사진출처: pixabay.com, 콜로세움 내부
나우마키아 모의 해전에 열광하는 로마인들
건설 초기에는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에 물을 채워 '나우마키아Naumachia'라는 모의 해전(模擬海戰)을 공연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일러스트를 들여다보며 상상해보니, 낭만적이란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해전(海戰) 공연이라니,로마인들의 방대한 스케일과 호전적인 삶의 방식이 놀랍기만 하다.
나우마키아 모의 해전 역사는 로마 시저(Caesar) 집권 당시인 BC 46년까지 거슬러 간다. 가장 유명한 모의 해전은 글라디우스(Cladius) 황제가 거행한 경기로 19,000명이나 참가했다고 한다. 모의 해전에 참가한 사람들은 전사와 포로나 죄인이었다.
이 경기는 국방 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황제나 귀족의 오락이었다니, 더 놀랍다.
대전차 경기장 (Circus Maximus)
대전차 경기장은 고대 로마 제국의 가장 오래된 가장 큰 경기장이다. 한꺼번에 약 2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속 경사진 비탈로 남아있는 곳이 모두 계단식으로 지어진 관중석이었다고 하니, 그 거대한 규모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진다.
우리 같은 이방인이 고대 전차 경주장인지 모르고 이곳을 지나친다면, 가뭄으로 바닥이 다 드러난 강줄기이거나 우리나라 송파나루처럼 대홍수를 겪고, 후에 샛강 매립으로 버려진 공터쯤으로 생각할 법도 하다.
그리고 생각하겠지. '왜, 이런 금싸라기 땅을 개발하지 않는 거냐고? 와, 아깝다!라고.
이곳은 고대 로마인들의 전차 경주장이었고,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순교 장소이기도 했다.지금은 로마 시민들이 애용하는 산책장소이며, 우리 같은 먼 나라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즐겨 찾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인들도 경마장을 들고나는 현대인들처럼 경기마다 돈을 걸고 시합을 즐겼다고 하니, 고대인이나 현대인이나 도박과 쇼(경기)를 즐기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인들이 즐긴 쇼는 좀 더 잔인한 원초적 본능이 작동했다면, 현대인들은 그 본능을 문화인이란 가면 속에 숨겨가며 짜릿함을 즐기는 것이 서로 닮아있다. 과학과 의학은 눈부시게 발달해 왔지만, 인문학과 철학은 제자리걸음이라고들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도 같다.
널따란 '대전차 경기장'이 휑하다.
로마인들의 찬란했던 역사는 유적으로 남아, 오늘도 세계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남아있지만, 문득 함성과 스릴 넘치던 영화 <벤허> 한 장면이 떠올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곳을 영화 <벤허> 촬영지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란다.
인생은 짧지만, 쉬지 않고 이어온 인류 역사와 그들이 남긴 건축물과 예술, 문화를 보고 느끼며 감탄하는 순간, 어찌 인생이 짧다고만 하겠는가!
싸우고 지지고 볶아도 모두 이 지구촌주인공들이다. 승자 뒤에 어두운 그림자로 남겨진 약자의 역사까지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런 암울한 그림자는 고대와 중세, 근세를 거쳐 20세기에도 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과 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을 통해 인류에 심각한 상처와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새로운 세계대전 발발은 강대국들조차 섣불리 나서지 못하도록 서로 견제하고 조정하는 구조이다.
지구촌 전체가 가끔 살얼음판을 건너기도 하지만, 모두 세계 대전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