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입, 포로 로마노, 캄피돌리오 언덕, 인술라로마나
대전차 관광을 마치고, 이곳에서부터 로마 시내 벤츠 투어를 시작한다. 탔다 내렸다를 계속 반복하며, 유적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어, '벤츠를 탔다'라는 편안함과 쾌적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로마시대 만들어진 돌(잡석) 길인 자동차 도로 역시 쾌적함을 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바쁜 여행자들에겐 관광의 선택과 집중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벤츠 투어다.
레드루가 찍어 준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우리 2조 벤츠 기사분은 이태리 미남이었네. 주주와 레드루 얼굴에만 내리던 햇살이 기사분 얼굴에도 머물고 있다. 현지인과 찍은 사진도 추억 속에 담는다.
로마 중심부인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델라 교회 입구 벽면에는 진실을 심판한다는 얼굴 조각상이 있다.
거짓을 말한 사람이 이곳 대리석 가면 입 속으로 손을 넣으면 손이 잘린다는 전설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의 알콩달콩했던 장면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트레비 분수'도 이 영화로 더 유명해졌다.
기원전 4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는 대리석 가면이다.
강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다. 이 조각상이 진실과 거짓을 심판하는 '진실의 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하필 우리가 방문한 시간, 진실의 입 입구엔 일본 단체관광객들이 긴 줄을 서 있다. 30여 분쯤 기다려야 우리 손도 넣어볼 수 있다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쇠창살 안으로 폰만 디밀어 넣고, 겨우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섰다. 주주와 레드로는 대부분 진실만 이야기하며 살아왔으니, 굳이 넣어보지 않아도 된다.
벤츠는 다른 장소에서 대기 중이고, 우리는 캄피돌리오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뒤로 천주교 성당이 있고, 그 왼쪽으로 16세기 지어진 산 주세페 데 팔레냐미 교회(Chiesa di San Giuseppe dei Falegnami)인 오렌지색 건물이 보인다.
2018년 여름, 교회 지붕이 무너져 내렸으나 지금은 보수된 상태다. 지붕에 그 흔적은 남아 있지만, 이렇게 건재하니 다행이다.
붕괴 당시 교회가 잠겨 있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포로 로마노는 고대 고마 시민의 생활 중심지로, 캄피돌리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폐허로 남아있지만, 로마인들이 누렸을 풍족한 일상이 이 유적지를 통해 자연스레 그려진다. 2개 개선문과 신전 형태가 조금씩 남아있으나, 대부분 기둥과 초석만 남아있다.
이곳은 로마 주요 언덕들이 만나는 곳이며, 당시 발전된 정치와 경제로 상점, 신전, 바실리카들이 꽉 들어찼던 곳이다. 공화당과 원로원 등 공공건물도 함께 어우러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다.
캄피돌리오 언덕은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 중 하나다. 해발 35.9m 언덕 위 주피터 신전이 있던 로마 제국 심장부였다. 로마 제국의 상징인 캄피돌리오 광장 입구는 바티칸을 향해 열려 있다. 코르도나타(Cordonata)라 불리는 완만한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광장에 이른다. 계단 아래서 광장을 올려다 보면, 계단의 높이가 같아 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이 넓어진다. 이런 시각적 통일성과 조화로움은 현대인들이 바라보아도 저절로 감탄을 부른다. 이는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곳은 로마제국의 상징이었다. 캄피돌리오 광장 입구는 바티칸을 향해있다. 이 광장은 1547년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미켈란젤로는 대칭을 사랑한 예술가였다. 한쪽에 뭔가를 세우면 반대쪽도 똑같이 세우곤 했다. 세 개 궁전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도 완벽한 대칭구조를 이룬다.
고대 로마 문서보관청이던 위 사진 정면 건물인 세 나토 리오 궁전은 현재 로마시 청사로 사용된다. 위 사진에서 대칭을 이루는 오른쪽 콘세르바토리 궁전과 왼쪽 팔라노 누오보 궁전은 현대 미술관과 카피 톨리아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광장 입구 양편에는 로마 공화정 시절 로마군을 도와 주변 부족들을 물리친 디오스 쿠리 형제 석상도 대칭을 이루며 서있다. 중앙에 있는 시청 건물 종탑은 마르티노 론기(Martino Longhi) 설계로 1578~1582년에 걸쳐 건설됐다.
광장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기마상이 서 있다. 로마제국 멸망 후, 기독교도들은 로마제국 곳곳에 있던 황제들 청동상을 녹여 없앴다. 캄피돌리오 광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동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동상으로 오인한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복제품이다. 원본은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높은 언덕인 이곳은 '세상의 머리(caput mundi)'로 불리다, 이 명칭이 변해 '수도'란 의미를 지닌 '캄피돌리오'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상의 머리라 불렸던 이곳도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함께 황폐한 땅으로 변해갔으나,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를 만나 지금처럼 아름다운 광장으로 거듭났다.
세나리오 궁과 양측 콘세르바토리 궁전, 팔라로 누오보 궁은 83도의 각도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있다.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미적 감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르네상스 시대 궁전 건축물과 광장이 지금까지 그대로 잘 보전되어, 세계인 모두가 함께 어울려 감상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이탈리안인들에게 광장이란 공공의 공간조차 예술작품이었구나! 마치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처럼.
콘세르바토리 궁전(사진 오른쪽 건물) 뒤로 돌아가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시에서 관리하는 무료 개방 화장실이 있다. 로마도 다른 유럽 도시들처럼 대부분 화장실이 유료다. 이곳은 관리인 한 분이 상주하면서 수시로 청결상태를 체크하고 있다. 눈길이 마주치면 상냥한 미소를 건네는 친절한 여사다.
콘세르바토리 궁전 뒤쪽 건물(개방 화장실이 있는 건물) 2층 옥상에서 오른쪽 앞을 바라보면, 우리가 잠시 후에 들릴 조국의 제단 흰 탑 건축물이 가깝게 보인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내려오다 보면, 바로 오른쪽으로 아라 코엘리의 성모 대성당이 올려다 보인다.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내려오다 보면, 바로 오른쪽으로 아라 코엘리의 성모 대성당이 올려다 보인다. 12세기 로마네스크 고딕 건축물인 천단의 성모 성당은 소박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웅장하고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관련자료 https://teacupsandbcups.com/wiki/Santa_Maria_in_Ara_Coeli
캄피돌리오 언덕을 둘러보고 조국의 제단과 베네치아 광장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오른쪽으로 아라 코엘리의 성모 대성당이 있고, 그 바로 아래 낡아 보이는 유적지가 눈길을 끈다. 대성당 아래로 허물어진 건물 2채(아래 사진)가 보이는데, 남아있는 기둥과 초석은 아직도 단단하고 튼튼해 보인다. 이 유적지는 로마 시민들이 아파트로 사용했던 건축물이다.
로마시대에는 인술라와 도무스라는 두 가지 형태의 주택이 있었다. 도무스는 귀족들이 사는 호화로운 저택, 인술라는 서민들이 사는 다세대 주택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극명하게 드러나는 빈부 격차를 마주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서민들이 살다 간 주택은 신전이나 예술작품보다 잘 보존하기도 어렵나 보다. 예산 탓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렸거나 유적 가치에서 그 중요성이 덜하다 판단해서였겠지.
우리도 콜로세움, 판테온 신전, 트레비 분수를 보러 서울서 멀리 로마까지 왔지만, 인술라로마나 건축물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이래서 발로 걷는 여행이 중요하다. 패키지여행을 하는 처지이니, 온전한 내발로 찾아다니며 걷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항상 바른 생각을 멈추거나 맑은 눈을 감지 않고 열심히 스케치한다.
S.P.Q.R. 은 'Senatus Populus Que Romanus' 약자로 영어로는 'the Senate and the People of Rome'며, '로마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뜻.
로마 인구는 재정 시대 후 급증하게 된다. 다세대 주택인 인술라로마나는 많은 인구를 한정된 공간 안에 수용하기 위한 통치 수단이었다. 게다다 당시 부유한 귀족들은 이런 인술라를 몇 채씩 사들여, 임대업으로 돈을 벌었다니, 정말 사람 사는 탐욕스러운 모습이야말로 고대나 현대나 똑같구나! 건물주 되는 것이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로망이라던가!
1층은 상가이고, 주거공간은 2층부터다. 인술라는 최대 7층까지 지어졌는데, 이 정도면 연립이라기보단 아파트가 아닐까? 실제 인술라 건축은 현대 아파트 기원이 되는 건축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채광과 통풍이 잘 되지 않아 1층 2층에서 불을 피우면 음식 냄새와 유해한 공기가 며칠씩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위층으로 갈수록 큰 영향을 받는 구조다.
현대 아파트는 고층일수록 비싸다. 팬트하우스도 최고층에 둔다. 그러나 인술로로마나에서는 정 반대였다. 빈민일수록 위층에 살았다. 2층에 사는 사람은 침대도 소유하고 요리도 해 먹었지만, 가장 위층에 사는 사람은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청해야 했고 불도 함부로 피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인술라는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여 지었다. 로마 대화재 당시 피해가 가장 컸던 곳도 이곳 서민 주거지였다.
아래 사진은 로마 관광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잠시 멈춰 선 전세버스 안에서 찍었다. 인술라 이야기가 나왔으니 미리 당겨온 사진이다.
하단 2층까지 고대 인술라 옛 건물, 3~4층은 새로 쌓아 올려 현재 로마인들이 살고 있는 서민 다세대 주택이다. 로마에는 이처럼 옛 건축물 위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사용하는 예가 적지 않다. 진짜 제대로 된 리모델링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로마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인술라로마나에서 좀 더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조국의 제단과 베네치아 광장이 보인다. 조국의 제단과 베네치아 광장은 다음에서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