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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an 27. 2022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고대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사 흐름을 함께 살펴본다.


시스티나 예배당 (Cappella Sistina)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 식스투스 4세가 1473~1481년에 세운 성당으로 바티칸 미술관 안에 속해 있다.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를 하는 신성한 장소다. 성당 이름도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성모승천을 기념하는 시스티나 성당은 조반니 데 돌치가 설계하고 바치오 폰 텔리가 건축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성당이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부터 1512년 사이 성당 천장에 12,000점 그림을 그렸다.

  르네상스로 건너가기 전, 고대에서 중세와 르네상스까지 미술사 흐름을 잠시 살펴본다.    


초기 기독교  

사진출처: 모두를 위한 열린 강좌 중세예술문화사 3  - 카타콤에 그려진 선한 목자 /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바티칸박물관

  카타콤(Cataconb)은 흙으로 구멍을 뚫어서 만든 초기 기독교 지하 공동묘지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예배했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나올 때에는 거의 장님이 되어 나올 정도였다. 약 10평 정도 작은 공간에서 400명이 찬송을 하였고, 전염병이 돌면 삼분의 일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가 핍박을 받지 않을 때 밖으로 나왔던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타락한 세상을 보고 후회하며, 다시 들어가 생활하기도 했다.

  나폴리, 시라쿠사이, 말타, 아프리카, 소아시아 등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당시 사람들은 부활을 생각해서 시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지하에 묻었다. 그 지하 카타콤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가운데 ‘선한 목자’가 그려져 있다.

  카타콤 천장에는 성경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요나가 고기에게 잡아먹혀 그 뱃속에서 3일간 들어가 있다 토해진 그림에서도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천장 화가 그려질 무렵 그리스도가 공인되었다.      


  로마시대 석관(359년)에는 신앙 이야기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석관 위쪽 가운데 예수 모습, 오른쪽 베드로와 왼쪽 바울의 모습이 보인다.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모습도 보인다. 신심을 강조한 그림이다. 베드로가 잡혀가는 모습, 빌라도가 손 씻는 장면, 욥이 덩어리 위에 앉아있는 모습, 아담과 이브, 당귀를 타고 있는 예수,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간 의연한 모습 등 성서가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중세   

  르네상스 시대와 상반되는 의미의 시대. 중간에 낀 세대라는 뜻. 470년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동로마 제국까지 신앙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봉건시대엔 성을 많이 만들어 외부의 침입을 막았다. 800년, 비잔틴 제국, 이슬람 세력, 야만족의 족속(서로마 쪽)이 있었다. 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야만족들도 나중에 기독교를 갖게 되고, 동서 쪽은 같은 기독교 국가가 된다. 1000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첫 승리를 거두지만, 나중에 예루살렘은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간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산 비탈레 성당 / '유스티아누스 황제 와 수행원들' 547년경 모자이크

  '유스티아누스 황제와 수행원들'을 감상하다 보면, 신이 아닌 황제 머리 뒤에 후광이 빛난다. 생존하는 사람에게는 원래 정사각형 후광을 사용해야 하지만, 당시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권위가 그대로 느껴진다.

  모자이크는 비잔틴 회화를 대표한다. 모자이크 기법은 로마제국 당시 바닥 장식 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사실주의 미술을 추구한 경향으로 건물 내부 장식 등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많이 사용되기도 했다.

  옛 서로마 제국의 수도 라벤나에 세워진 산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벽화를 살펴보면,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로마를 이루려 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상이 비잔틴제국의 정교 합일 황제 교황 정치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중세는 건축이 그림보다 중요했다. 그림 자체만의 의미는 작고, 건물 속에 그려진 그림 의미가 더 중요했던 시기다. 로마네스크 건축과 고딕 건축을 이해해야 한다. 로마네스크는 작은 창문과 두꺼운 기둥으로, 고딕은 첨탑 식 벽에 창문을 많이 만들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파사드 / 복원된 샤르트르 대성당의 고대 익랑 창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고딕 성당의 대명사이다. 114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194년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건물을 지을 때 새로 개발한 기술을 도입, 중심부에 여러 개의 커다란 창문을 만들 수 있었다. 총 2000제곱미터가 넘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선명하게 빛나면서, 석재의 흰 빛과 대조를 이뤄 더욱 아름답다.



르네상스(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발생했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동방 쪽 이슬람 문화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류가 시작되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커진다.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의 도시가 발달하고, 도시에서 돈을 번 사람들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예술가 가문도 등장하고, 이탈리아인 들은 그리스 로마 미술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미술(15~16세기)은 위대한 예술과 문화가 찬란하게 빛났던 인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고대 그리스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유럽 근세 미술로 발전했다.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는 예술의 특정 시대 의미뿐 아니라, 중세 끝과 근세 출발을 알리는 전환기를 아우른다.

  15세기 피렌체를 중심으로 보티첼리(1445~1510), 만테냐(1430~1506), 16세기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에서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같은 거장들이 등장, 1490년대 초부터 1527년까지 지속되었던 르네상스(high-renaissance) 전성기 회화 양식을 완성한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0~1511

  그러나 바티칸 미술관 관련 글 어디에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작품이 소개된 적은 없다. 바티칸 미술관 입장권에서 라파엘로 작품 '아테네 학당' 중앙 부분 그림 말고는.

회화관(피나코테카)에 들리지 못하고, 솔방울 정원과 팔각형 안뜰로 자리를 옮겨, 조각 작품 위주로 감상했기 때문이다. 이번 패키지여행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조각보다 회화를 더 즐기는 편이어서 크게 아쉬웠다.

  회화관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토, 라파엘로, 다빈치, 카바라바조 등의 명화가 가득하다는 데, 주주와 레드루는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1452년 4월~ 1519년 5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최고 화가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한 인간에게 이렇게 많은 능력이 모두 천부적으로 내려져도 되는 것일까? 평범한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 경지에 도달했던 인물을 이렇게 기록과 작품으로 만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그는 호기심 많은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사물을 관찰하고, 스케치하곤 했다. 그림과 라틴어는 물론, 운하 설계까지 한 과학자였다.

1519년 5월 2일 67세 사망.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랑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모든 유산을 상속했다. 1570년 멜지 사망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초상화 / 모나리자 /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는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해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져 있다. 모나리자 미소는 오늘날까지도 보는 사람에게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표현의 극치를 보여주는 다빈의 대표작이다.


  최후의 만찬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기 하루 전날 만찬이다. 12 제자가 흰 테이블을 중심으로 일렬로 앉아 있고 예수를 중심으로 양쪽에 6명씩 나누어져 있다. 배경에 3개 창문이 보이는데 모든 것은 삼위일체, 4개 복음서, 새 예루살렘 12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 원근법으로 그려져, 그림이 안정되고 균형 잡혀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시대, 또 한 사람의 천재,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 1475년 3월~1564년 2월)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다.

  미켈란젤로 어머니는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났다. 시골 유모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 남편이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였다.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 재능이 두드러지는 데에 영향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가장 즐거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부로 하는 직업을 갖길 원했다. 삼촌들도 그림 그리는 미켈란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릴 때 회화교육을 제대로 받질 못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스스로 회화를 꺼리거나 조각의 불완전한 버전이 회화라며 본인을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여겼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완성한 후, 화가로서 천재적인 재능까지 널리 알리게 된다.


사진: 위키백과 -피에타 상 / 다비드 상/ 미켈란젤로

  피에타 은 미켈란젤로 피에타 상 작품 중 최초의 것이다. 당시 로마에 체류 중이었던 프랑스 추기경 장 드 빌레르 의뢰로 만든 것이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이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 시신을 떠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을 묘사했다. 진품은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다.     


  다비드상은 적의 대장 골리앗을 돌팔매로 죽인 소년 영웅으로 뿐 아니라, 정의로운 개혁 왕으로서 피렌체 개혁정부 상징이 되었다. 5.49m의 거대한 다비드 누드상은 자유 수호의 상징으로 로마 시청인 팔라조 베키오 앞에 세워졌다. 당시 시민들은 도전적인 시선과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진 순수한 다비드 상을 보며, 자신들의 미덕이 구현되었다고 믿었다. 이 다비드 상 진품은 1873년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Accademia Gallery)으로 옮겨졌으며, 원래 자리에는 복제품이 서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서양 미술사에 눈 뜨던 내 청소년 시절부터 항상 그리던 곳이다. 10대 때 바람을 60대로 들어선 이제라도 이루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하다. 미켈란젤로 천장화를 직접 내 눈에 담고 싶었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지만, 인파로 엄청 붐비던 비오 클레멘스 박물관 등을 거쳐 오면서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다. 

  천지창조 천장화책과 화면에서 만났을 때도 넋을 놓고 보았지만, 인간의 손으로 그려진 작품이라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런 명화를 직접 마주하게 되니, 거대한 작품 스케일과 신의 경지에 이른 미켈란젤로의 초인적인 능력에 압도당한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을 받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렸다.

Pixabay.com - 시스티나 예배당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 활동 중이었으나, 그의 재능을 시기한 조각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에게 그리도록 추천했고, 그는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는 높다란 작업대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불편한 자세로 4년간 그림을 그렸다. 천장화를 창조적으로 그려 완성한 것은 오로지 그의 섬세하고 위대한 예술작업의 결과물이다.

  이 엄청난 작업은 예술이라기보단 중노동에 가까웠다. 미켈란젤로는 목과 눈에 심한 이상이 생기기도 했고, 변덕스러운 교황과 타툼도 있어서 이 위대한 작업을 무척 힘들어했다. 

  4년 후, 그의 고된 작업은 800㎡ 원형 천장을 완벽하게 장식한 대작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고생 끝에 완성된 이 걸작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하며 찬양하고 감탄했다. 그를 시기했던 경쟁자 건축가 브라만테도 결국 미켈란젤로의 위대함을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출처: 나무 위키에서 캡처한 시스티나 예배당 안과 밖

https://bit.ly/3ijVRW3   ☜  나무 위키로 가면, 시스티나 예배당의 불후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구역이다 보니 명화를 직접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자료사진을 가져와 실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천지창조'


사진출처: Pixabay.com - 시스티나 성당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1508~1512)

  시스티나 예배당은 장방형 천정과 벽의 장식품들로 유명하다. 정면 안쪽 벽엔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4~1541)이 있다. 좌우 벽엔 보티첼리, 핀토 리키오, 페루 지니, 로셀리, 시뇨렐리, 도메니코, 기르련다 이오 '구약성서' 이야기 벽화(1481~1483)들로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다.


사진: 나무 위키 -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13.7 x 12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시스티나 예배당 최후의 심판 등 천정화와 벽화를 입체적으로 감상하면서 아쉬움 달래보기!

https://www.vatican.va/various/cappelle/sistina_vr/index.html


  사람들에 밀려가면 작품 감상을 놓치고, 잠시 작품에 눈길이 머물면 표류하듯 헤매다 다시 떠밀린다. 모든 사람들이 자의 반 타의 반 저절로 강물처럼 흘러간다. 일행이나 가이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살짝 불안했고, 딸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 간다. 이런 혼란 속에 멈춰 서서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한 창세기 이야기는 내 머리 위로 강물처럼 함께 흘러가 버렸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이야기야말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이곳으로 몰려든 세계인들의 관심이 이를 대변해 준다.

그런데 "우~ 실제, 이 작품의 위대함을 제대로 음미하며 감상할 수 조차 없는 현실은 어찌할꼬?" 천정화 사진은 찍을 수 없더라도, 입구나 출구에서 주주와 레드루 인증 숏 한 장쯤은 남기고 싶었는데...


사진: Pixabay.com - 시스티나 예배당, 미켈란젤로 작품 '예수'



  어쨌든 위 사진 속 문을 나서니,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천지 창조' 천정화 잘 감상하고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 손등이라도 살짝 꼬집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적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 물결 사이를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 나온 기억밖엔 없으니.

암튼, 일행이 모두 모였다. 핼쑥해진 얼굴로 눈인사를 나누고, 계단을 내려간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보고 올 수는 있지만, 카메라 속에 담아 올 수는 없는 곳이다. 기억 속에라도 가득 담아 오려했지만, 엄청난 인파 속에서 고아처럼 헤매다 떠밀려 나왔다.



  사람들 물결 따라 정신없이 흘러 다니다 보니, 시스티나 예배당 건물 외관도 못 본채, 우리는 성 베드로 성당 오른쪽 아치형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올 때도 인파의 긴 줄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듯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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