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눈에 비친 어머니 오드리의 소박한 모습
『오드리 앳 홈』은 아들 루카 도티가 어머니 오드리를 가까이서 지켜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아침식사 원칙, 아내와 어머니로서 모습, 행복에 대한 철학과 일상이 담긴 다양한 레시피, 최초로 공개된 250여 장의 개인적인 사진 등이 담긴 회고록이자, 식탁 전기(傳記)이다.
루카 도티는 부엌 선반에서 먼지 덮인 너덜너덜한 공책 한 권을 발견하면서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책에 담긴 레시피는 다양하고 응용 가능한 팁까지 자상하게 소개된다.
특히, 오드리가 사랑한 파스타는 우리도 좋아하는 음식이고,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서민적인 국수 요리여서 더 정이 간다.
조금 아쉽다면, 루카도 자신의 가족들과 요리를 함께 만드는 과정, 완성된 요리의 사진 등이 책에 함께 담아냈더라면, 하는 점이다.
3대가 하나의 레시피로 이어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오드리는 평생 전쟁을 끌어안고 살았다.
아들 루카는 9살 무렵, 저금한 돈으로 작은 알람시계를 산다.
시계를 본 오드리는 아들에게 크게 화를 냈다.
시계를 만든 독일 회사가 전쟁 동안 포로들의 강제노동으로 이윤을 얻었다는 걸 아들은 알 수 없었지만.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오드리는 친척이 영국군 한 사람을 숨겨주었을 때,
발각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감정을 직접 경험했다.
오드리는 집에서 비밀리에 준비한 발레 공연으로 자금을 모아,
레지스탕스를 돕기도 한 용감한 소녀였다.
전쟁이 끝난 2년 뒤, 오드리는 <비밀 은신처>라는 제목의 원고를 받아 든다.
1929년 오드리와 같은 해에 태어나, 암스테르담 아파트 책장 뒤 은신처에 2년을 숨어 살다 세상을 떠난, 안네 프랑크 일기였다.
작곡가 마이클 틸튼 토머스가 자신이 쓴 교향곡 내레이션을 오드리에게 부탁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1990년 3월 미국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 연주 투어를 갖고. 5월엔 런던에서도 진행한다.
연주회의 모든 수익금은 유니세프가 지원하는 어린이들에게 보내졌다.
오드리는 전쟁으로 배고픔을 경험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와 초콜릿이다.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포모도로 스파게티는
오드리가 집을 떠났다 돌아오면, 꼭 챙겨 먹는 첫 번째 음식이었다.
초콜릿은 그녀의 '슬픔을 날려버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부모님의 부부싸움으로 생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지속되어 온 습관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던 날, 네덜란드 군인이 초콜릿 바 7개를 주었던 기억도 선명하다.
오드리는 아들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이며, 초콜릿 케이크를 직접 만들곤 했다.
배우가 아닌 인간 오드리의 소박한 모습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세계적인 배우로서 항상 우아한 삶, 값비싼 음식만 먹을 것 같았는데, 어린 시절 전쟁의 아픔과 굶주림의 고통을 직접 겪은 오드리로서는 음식을 타박한 적이 없다.
텃밭에서 싱싱한 야채를 직접 키워 식탁에 올렸고, 여러 마리의 애견을 사랑으로 돌보는 모습이 평범하고, 인간적이었다.
루카는 어머니의 일상이 깃든 50가지 레시피를 통해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애완견에 대한 오드리의 사랑은 사진마다 가득 넘쳐나고, 꽃과 야채와 과일을 가꾸며 살아가는 그녀의 따사로운 손길은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오드리는 1954년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샤레이드>, <어두워질 때까지> 등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현대판 요정이라는 평도 받았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찾아간 곳은 수단,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 곳이 넘는다.
1992년 오드리는 소말리아에 있었다.
많은 어린이가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참상을 목격한 오드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충격을 받았으며, 고통을 함께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기꺼이 아이들을 보듬어 안았으며, 전쟁과 전염병 지역도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갔다.
오드리는 아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강한 울림이 되었다.
이후 많은 명사들이 자신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부와 자선 활동에 뛰어들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떠났다. 9월 오드리는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고, 10월 종양 진단을 받는다.
1993년 라 페지블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다음 해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다.
오드리 헵번은 미국 배우인 멜 퍼러와 결혼, 아들 션 헵번 퍼러를 두고, 1968년 이혼한다.
1969년 헵번은 연하의 이탈리아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 이 책의 저자인 루카 도티를 낳지만, 남편의 바람기로 다시 파경을 맞는다.
50대부터 1993년 사망하기 전까지,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와 동거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두 아들 션과 루카는 1994년 헵번 아동 기금을 설립했다.
오드리 헵번 자선활동을 기리기 위해, 전 세계에 도움이 필요한 아동을 돕는 기금을 운용 중이다.
큰 아들 션은 2016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 사업에도 참여했다.
세월호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션은 희생당한 아이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사회적 기업 트리플래닛에 전달, 시민 모금 등을 통해 팽목항 인근에 기억의 숲이 조성됐다.
기억의 숲에는 304인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은행나무 304그루가 심어졌다.
오드리의 선한 영향력은 대를 이어 이어져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