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변신시켰거나~
- 프란츠 카프카 -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남편과 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대로 가족 중 한 사람이 벌레로 변신한다면, 나는 얼마나 놀라운 반응을 보일까?'
오랫동안 '변신'이라는 모티브는 동화, 민담, 신화 등에 자주 등장했다.
'프란츠 카프카'가 주인공 '그레고르'를 벌레로 변신시킨 이유를 들여다보면,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만 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아침 깨어나 보니,
벌레로 변해 있는 이 소설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걸까?
카프카는 왜 이런 설정을 했을까?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예전에 즐겨먹던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지저분하고 부패한 음식을 먹고 어두운 곳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들 대화를 들을 수 있고, 여동생 '그레테'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선율에 감동한다.
그레고르는 벌레 형체를 하고 벌레로서 특성을 갖게 되었으나, 인간으로서 특성도 지닌 복합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레고르가 아무리 간청해도 소용없었다. 간청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그만 단념하고 얌전하게 고개를 돌려도 아버지는 더욱 세차게 발을 굴러댈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사정없이 몰아 대면서 '쉿 쉿' 소리를 냈다.... 그는 몸을 돌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아버지를 조급하게 할까 봐 두려웠고, 또 언제 어느 때 아버지의 손에 들린 지팡이로부터 등이나 머리에 치명적인 타격이 날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40쪽)
카프카가 의도한 변신의 상징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벌레는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했다.
그레고르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는 장남으로, 의류회사 영업직 사원이다.
항상 고객들을 상대하며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에서 다른 직원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그런 그가 가족이나 직장 상사, 동료들로부터 인간적인 교류와 대우를 받고 있었을까?
그는 왜 이 직장을 계속 다닐 수밖에 없었을까?
- '이기적인 21세기 직장인들이라면, 연봉이 줄더라도 이직하고, 자신을 위해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살지 않았을까?' -
결국,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신한다.
벌레가 된 상황에서도 가족과 회사만 걱정하다 마지막엔 가족을 위해 스스로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가족을 위해 마지막까지 희생하는 그레고르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아, 세상에! 나는 어쩌다 이런 고달픈 직업을 택했단 말인가. 허구한 날 여행만 다녀야 하다니. 회사에 앉아 실제의 업무를 보는 일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심하다. 게다가 여행할 때의 이런저런 피곤한 일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기차를 제대로 갈아타기 위해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일, 불규칙하고 형편없는 식사, 상대가 늘 바뀌어 결코 오래갈 수 없는 만남과 결코 진실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적 교류 등등, 악마여, 제발 좀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져가다오.' (8~9쪽)
온몸에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차차 약해져서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등에 박혀 썩어버린 사과와 그 주변의 염증 부위가 솜털 같은 먼지로 온통 뒤덮여 있었는데, 이미 그런 것들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에 대해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 여동생보다 그 자신이 더욱 단호할 것이다. 탑 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렇게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창밖의 세상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까지는 아직 알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푹 떨어졌고,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117쪽)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리는 인간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평생 성실하게 가족을 위해 살아온 그레고리의 짧았던 인생이 마냥 허망하게 느껴진다.
'가족들에 대해 감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돌이켜 생각'해보려 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고 아프게 한다.
그레고르의 모든 인간적 제스처는 벌레 허울 속에서 거대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당신은 벌레 허울을 쓴 가족이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레고르 가족은 아들과 오빠 시체가 아닌 한낱 벌레의 죽음으로 치부한다.
오히려 속 시원해하며, 새 희망에 부푼다.
삶은 그렇게 왜곡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언어를 쓰고, 한 지붕 아래 살아도 오로지 혼자일 때가 있다.
1950년대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은 얼마나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가며 삶을 지켜가야 했는지...
지금도 비인간적인 학대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이야기는 잊힐만하면, 또 매스컴 한편을 차지한다. 죽음이란 이름으로.
그레고리 가족에게 한 번 더 묻고 싶다.
벌레의 모습이었다 해도 아들이 '변신'한 것으로 -이해는 안 되어도- 받아들일 순 없었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변신시켰거나,
비인간성에서 '본래의 자아를 지키고자 한 인간'을 형상화했거나,
놀라운 통찰력과 직관력으로 인간 본성을 꿰뚫어 본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그들이 탄 차량에는 오붓하게 그들 가족뿐이었는데, 따스한 햇살이 차 안 곳곳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생각해보니 전망이 그리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서로 상세히 물어본 적이 없었지만 세 사람 모두 꽤 괜찮은 일자리를 얻은 데다, 특히 앞으로는 전망이 밝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집을 옮기는 일일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레고르가 고른 지금의 집보다 더 작긴 해도 더 싸고 위치도 좋은, 대체적으로 보다 실용적인 집을 얻고자 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잠자 씨 부부는 점점 생기가 도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여겨졌다. (126쪽)
이 책은 '루이스 스카 파티'의 삽화로 더 빛난다.
그레고르 변신 전 사람 모습과 현재를 보여주는 벌레 모습이 삽화로 생생하게 함께 등장한다.
활자에서 생략된 채 지나친 주인공 그레고르의 섬세한 얼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프란츠 카프카'의 갸름한 얼굴과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삽화 속 그레고르의 사람 얼굴을 들여다봤는지도 모르겠다.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던 카프카의 목소리가 울린다.
우리는 '거기에' 속하고 싶다.
우리 모두 각자 존재 가치와 이유를 확인하며 살고 싶다.
냉대나 무관심, 언어 단절, 일벌레, 돈 버는 기계, 비지속적 인간관계...
더 이상 황폐화, 기계화, 비인간화되어가진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