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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온책읽기

『나의 눈』데이비드 호킨스 저

무엇인가를 좋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그것을 원한고 있음을 뜻한다.

by Someday


『THE EYE of the I』'당신의 의식은 크게 열리고 성장한다.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저자는 사후 세계와 신의 존재를 믿는다.

결국 영성도 신의 존재를 믿을 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밝힌다.



책을 펼치면 사색의 길로 들어서서 호젓하게 걷게 된다.

얕은 지식들, 감정의 굴곡, 살아온 경험, 굳어진 습관 등 주관적인 내면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만난다.

어리석고 모호한 것들을 분명하게 밝히는 지침으로 작동한다.

스스로의 내면을 꼼꼼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은 깨달음을 정의한다.

깨달음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일들을 상세하게 안내하는 길잡이다.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고,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343쪽)

특정 종교의 교리나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 형이상학적인 인간 모습을 담기에 충분한 책이다.



『나의 눈』 'THE EYE of the I'은 <참다운 앎>으로 표현된 <신성의 참나>이다. (52쪽)

알라·하느님·브라흐만·크리슈나의 드러나지 않은, 초월적인 신성은 <참나>·아트만, 곧 내재적인 신성으로 드러난다.

영적인 진화는 새로운 어떤 것을 획득함으로써가 아니라 기존의 장애를 제거함으로써 일어난다.

헌신하는 자세는, 마음이 소중히 여겨왔던 망상과 환상을 버릴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마음이 점차 자유로워지고, <진리>의 빛에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게 해 준다.

시간 감각이 사라지면 모든 욕구와 결핍감도 사라진다. 고요함을 동반한 무한한 <참 존재>가 모든 정신적, 감정적 활동을 대신한다.



'모든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다.' 중요한 진술을 받아들인 것에서부터 '진리의 실체'를 찾아간다. (231쪽)

'진리는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다.

'객관적인 진리조차 주관적인 체험의 경우를 제외하고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지식과 지혜는 주관적이다.

주관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설사 완전히 객관적인 물질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조차 우리의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격한 유물론자도 결국, 유물론에 신뢰할 만한 권위를 부여해 주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앎일 뿐이다.

신, 참 존재, 불성, 그리스도, 아바나, 진리, 깨달음, 참나, 크리슈나, 참 성품, 참다운 앎, 하나, 절대, 전체, 총체, 신성 등이 갖는 의미의 차이점은 없다. (233쪽)

서로 다른 언어 형태들은 그 가르침을 낳은 문화를 반영한다.

이들은 다른 점이 있을 수 없다.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단지 잘못 이해한 탓이고, 맥락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종교들 간에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지만, 참으로 영적인 가르침들 간에는 있을 수 없다. 영성은 통합하고, 종교는 가른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존재하고,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모든 것을 두루 포괄하며, 거처(居處)와 지속과 부분이었다. 진리는 전체성 속에서 그것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명하고, 주관적인 '나'의 상태인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어우른다. 전체성은 어떤 나뉨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잘못된 관찰이나 신념체계가 존재하는 것일까?(252쪽)

언어는 생각의 패턴과 형상을 빚어내고 정의하며, 그 패턴과 형상은 세상에 그대로 투사된다.

일종의 의인화(擬人化) 하는 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작은 나무 곁에 큰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억누르고' 있고 '햇빛을 빼앗아간다'라고 한다.

또한 우리는 "그것은 잔인하고 성난 폭풍이었다"라고 말하고, "이 나무는 아름다운데 그 옆에 있는 나무는 흉하다고 볼품없다."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무지하다고 할 만큼 순진하고 의인화된 진술이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좋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그것을 원한고 있음을 뜻한다.

나쁘다고 말할 때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래 이 세상에는 어떤 목적어도, 부사도, 전치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적 연쇄도,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동사들도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명사들도 지각적 환상의 근원이 된다. 명사란 오직 관찰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경계(境界)와 특성 가운데서 관찰자가 제멋대로 선택한 것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참으로 알기 어려운 것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전하고, 전체적이며,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는 어떤 개벌적인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며, 설혹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 해도 그것에 부여된 이름은 그것이 아니다.



에고에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교만이다. (342쪽)

생각과 개념과 의견이라는 망상의 형태로 나타나는 교만은 무지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의 해독제는 철저한 겸허이다.

겸허는 지각이 지배하는 상태를 무너뜨린다. 자신이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대신 진리가 저절로 드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마음은 어떤 것도 제대로 알 능력이 없다. 마음은 '무엇 무엇에 대해서' 안다고 가정하는 것만 할 수 있다.


..... 생각의 본질에 대한 앎의 수단을 통해 상반된 여러 가지 양극은 해소된다. (388쪽)

즉, 깊은 성찰과 친숙해짐, 기도, 명상, 영감을 통해서 상반되는 것을 이해할 때 의식이 자동으로 양극을 초월하게 된다.

..... 인간은 영혼이자 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늘 선형적인 영역과 비선형적인 영역 모두에 존재하고 있다. 몸의 의심과 주관적인 앎이 깃들여 있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몸은 삶의 체험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요구의 가치가 부여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줄 때에만 행동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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