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늙음이 잘 어울려 서로 기대면서 내가 된다고 생각해 본다
이근화 시인은 1976년 생으로 200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칸트의 동물원 』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동시집 『안녕, 외계인』 『콧속의 작은 동물원』 산문집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 『고독할 권리』 등이 있다.
1부 발이 다 식은 채로
산문집 『고독할 권리』를 읽으면, 작가 이근화의 따뜻한 마음과 깊은 생각이 전해진다.
작가는 나이 든 사람들이 왜 쉽게 노여워하는지 40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는데, 나는 50대 끝자락에서야 '나이 듦'에 대한 비애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한 몸뚱이의 통증과 축축 처지는 순발력, 가물거리는 기억력을 인정하면서.
"인생은 저를 표준 한다.
표준 할 자기가 없는 때는 만상이 어찌 있으랴.
모두 허공이다." 『부녀 지광(婦女之光)』 권두언 - 19쪽
이어지는 글을 더 찾아보니,
‘나’라는 것이 없는 곳에 어찌인(人)과 물(物)의 별(別)이 있으랴!
가정도 없고 사회도 없도다.
인성은 자유를 찾는다.
자유가 없으면 노예다.
노예의 생활에 어찌 쾌락(快樂)이 있으랴..... - 《부녀 지광(婦女之光)》은 1924년 7월 15일 자로 창간된 여성 잡지, 속간(續刊) 미상.
작가는 '저를 표준'하여 자신을 지지해 줄 만상을 새롭게 발견하려는 이 땅의 여성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진학과 취업이 어렵다는 청년층의 위기 진단, 계층 간 소득 격차가 실질적으로 입시 결과와 취업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지만, 또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낙관적 전망을 내놓기는 어렵다.
지난한 삶을 견디며 용기 있게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작가 이근화는 읽고 쓰는 가운데 '나와 세계를 실감하는 편'이다.
그녀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감각에 대한 충일감,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존재와 관계에 대한 천착이 숙제처럼 주어졌다.
우리는 종종 너무 잔인하다. 무관심과 망각, 무책임과 냉대야말로 그 잔인함의 실체일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수만은 이들을 잃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지를 실감하게 되는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 29쪽
2부 생명의 작은 신호들
기다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며 걷는 이웃을 보고 작가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골초인 정수기 필터 교환해 주는 친절한 방문자에게서는 명랑함 뒤에 숨겨진 어떤 피로감을 느낀다.
원칙주의자 어린이집 주임은 엄격한 자기 통제와 규율 속에서 말하고 움직인다. 예뻐지는 걸 보면 좋은 일이 있는 것 같다.
둘째 아이는 동물 흉내 잘 내는 체육 선생님은 좋아하고, 셋째는 선생님의 붕붕 노란 자동차에 관심을 보인다.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 엉뚱한 짓을 보면 작가도 그와 같은 시절을 통과해냈다는 것을 상기한다.
우리 모두가 비슷하다.
성장은 즐거움이지만 괴롭기도 하다.
작가 이근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환한 고리를 지고 싶어 한다.
무심하고 불친절 이웃 말고 어린 시절 꿈꾸던 사회사업가, 부의 재분배를 위한 로비쯤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작가가 감명 깊게 본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나 역시 깊은 울림을 받은 영화다.
주인공은 '나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는다.
약자와 소외계층 안전망인 복지정책이 운영자 위주의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전락한 영국 사회 부조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기계적인 촘촘한 시스템은 복지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걸러내겠다는 취지였으나, 그 제도가 절실한 사람들에게까지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밀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이해와 공감이 결여되어 있는 세계에서 악이 너무 가깝게 실행되므로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거품 속의 환상과 실재하는 열망 사이의 거리가 멀다.
3부 시라는 절벽, 산문이라는 언덕
작가는 여행을 하면서 글을 쓰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는 글을 쓰지 못한다. 메모도 남기지 않는다니 놀랍다.
나는 여행하면서 약간의 메모와 많은 사진을 시간 별로 남긴다.
나도 낯선 곳에서 글을 쓰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지만, 여행 스케치를 남기는 것을 좋아하니, 사진이 나의 훌륭한 동선이 된다.
나는 여행을 즐긴다.
풍경보다 아름다운 것이 작품이고, 작품으로 인해 바로 그 공간이 의미 있어진다..... 시는 풍경에 흐르는 음악을 자신만의 개성적인 귀로 듣고 옮기는 작업이 아닐까. 그래서 시는 풍경에 대한 개인의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 82쪽
작가는 여행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대부분 도망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요즘은 사는 것이 심부름하는 기분이 들고 처절하니, 곧 다시 시가 쓰일 모양이다.
작가는 백색가루(밀가루)를 좋아한다.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빵 이외의 것은 믿지 않아
빵이 찢어지면서 거짓말이 툭 튀어나올 때
나의 입술은 왜 부풀어 오르는가
이토록 부드럽고 달콤하고 백색이어도 좋은가
네 입속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어서
커다란 손에 입 맞추고
나는 바깥이 된다. - 『빵 이외의 것』에서- 95쪽
나도 엄청 빵에 빠져 살던 사람이다. 지금은 빵을 쥐고 입으로 들어가는 손을 많이 말린다.
나이가 드니, 소화력도 약해지고 건강상 가공된 백색가루보다는 흰쌀밥에 잡곡을 조금씩 섞어 먹게 됐다.
오래 살고 싶은 건 아니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그토록 사랑하던 백색가루 빵을 가끔씩 밀쳐 낸다.
사람과 집은 모종의 관계를 맺고 관계라는 것은 일정한 공간을 함께 지내면 필연코 형성되는 것 같다.
울타리로부터 소외당하는 인물들에게 이 사회의 시스템은 그다지 호의적인 것 같지 않다. 적응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낯설게 눈을 감았다 뜨는 이들에게 이 세계는 영원히 바깥이다.
부적응과 겉돎은 우리가 지키는 상식과 모럴의 허위성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 129쪽
우리는 당연히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많은 여자들은 집을 벗어나고 싶을 때 결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들도 그럴까?
전혀 다른 공간의 집이지만 영원한 굴레가 되기도 한다.
이사를 단행해도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는 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은 주인의 표정을 닮아간다.
도시 재개발, 하우스푸어, 갭 투자는 사람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이 우리를 휘어잡고 우롱한다.
사람살이 속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가난과 분쟁 속에 온전한 집은 사라졌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 논리와 강자에게 유리한 시스템이 지배하는 공간이 우리 집을 무너뜨리고 있다.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상을 무심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갔다.
집은 그녀의 글쓰기 공간이다.
어떤 것은 일기가 되고, 어떤 것은 편지가, 어떤 것은 시가 됐다.
쓰고 지우고 버리고를 반복하면서.
4부 슬픔이라는 두툼한 장갑
작가는 영화 <아름다운 청춘>을 꺼내 들고 구겨진 인물 간에 고통과 상처에 주목한다.
이 영화의 원제 <모든 것은 공평하다 All Things Fair>이다.
1995년 덴마크 스웨덴 영화로 '엘비라 마디간'으로 널리 알려진 '보 비더보그' 감독 유작이다.
그의 아들인 요한 비더버그가 불륜을 벌이는 사춘기 소년으로 등장하는 성장 영화다.
독자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스웨덴의 한 고등학교로 따라간다.
학생과 여선생과의 불륜으로 선정적 작품으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순진한 소년 '스틱'이 세상에 눈뜨는 성장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스틱은 여선생 '비올라'와의 불륜을 알고 있는 패배주의적인 남편 프랭크로부터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워간다. 전쟁에 나간 형의 죽음을 통해 세상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스틱은 비올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래의 여학생과도 사귀어보지만 그는 너무나 일찍 세상에 눈떠버렸다.
비올라는 마음이 변한 스틱을 유급시킨다.
그러나 스틱은 당당하게 졸업식장에 참석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당시 유럽인의 방황과 혼돈을 상징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96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대표작 소설인 [책 읽어주는 남자]를 2008년 영화로 만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Reader>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 이근화는 이 영화에서 다룬 성장과 죽음, 폭력의 문제를 들여다보며 '언어'와 '책'에 주목한다.
낱말의 뜻을 가르쳐주거나 잘못된 말을 바로잡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억압된 욕망과 콤플렉스가 표출된다.
퍼즐 맞추기나 단어 놀이를 통해 사건의 암시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친근감이나 적대감 역시 언어의 문제로 그려진다.
언어는 소통의 매개가 되기도 하고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스틱이 학교를 떠날 때 교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 훔쳐 나오는 것이 바로 백과사전이다.
이제 그는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상처받은 프랭크는 자주 공평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무너진 사람들에게 공평함이란 가혹한 잣대일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고통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흘러가도록 방치함으로써 또 다른 상처를 낸다.
이 반복을 멈추고자 하는 의지를 언어의 안팎에 자리 잡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호평과 제의는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중 하나다. - 158쪽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기가 있어야 할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욕망으로 파행적인 관계 맺고 어두운 내면의 문제를 떼어내지 못한다.
부적절한 관계 맺음이나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내용이 그래서 허망하게 들린다.
어쩜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모습처럼 어이없고 허무하기만 하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살짝 등장하고, '코코 샤넬'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요가난다는 미국에 정착한 최초의 주요 인도 교사였다. 1927년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초청을 받기도 한다. 'LA 타임스'에 의해 "20세기 최초의 슈퍼스타 구루"로 불렸다. 그는 수도원을 만들고 제자들을 훈련시켰다.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미국의 주요 도시에 그룹을 두고 있다. 그의 원칙인 "평범한 생활과 높은 사고"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고아원 담벼락에 버려진 작은 소녀 가브리엘이 파리 패션 가를 선도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된다.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은 메종 샤넬의 설립자다.
특히, 여성복과 실용성이라는 부분에 한 획을 그은 패션 디자이너이다.
자국(프랑스)에서는 과대평가 논란이 있기도 했고, 나치 스파이 등으로 비판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작가 이근화는 프랑스 여성들에게 자유를 준 것은 사회,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샤넬의 파격적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샤넬은 몸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는 일을 했다.
지방 어부들의 의상에서 영감을 얻고, 속옷으로나 쓰이는 약하고 흐느적거리는 천으로 외투를 만들기도 했다.
생명력은 언제나 의외의 곳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직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로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 파리 매장을 전면 폐쇄하기도 했고, 전쟁 중 독일군에게 협력했다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바느질을 하는 것은 세상을 솔기 없이 수선하는 것이다"(롤랑 바르트)라는 말에 샤넬은 퍽 어울리는 것 같다.
요가난다와 샤넬의 인생은 삶의 국면이 다르고 자신의 길을 가는 방식이나 태도는 달라도 어떤 열정과 용기와 숭고함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로고처럼 샤넬은 우리를 묶고 있는 감옥 같은 것인지도. 우리는 한껏 자신을 뽐내며 '나'를 연출해 보지만 그것은 누군가 창조한 멋을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불안한 페이지를 들추며 나의 민낯에 대해 생각해 본다. -177쪽
'기울기와 스며듦에 관해서'편에서는 작가로서의 태도가 마음가짐이 독자에게 그대로 읽힌다.
傾(기울 경) - 어머니와 작가 자신과 딸들의 이야기
늙고 병든 엄마를 위로해 준 것은 내가 아니다, 나의 어린 딸 들이었다..... 할머니와 어린것들은 재밌고 즐거운데 늘 나 혼자 화가 나 있다. 아직 나는 한참 모자라다. 193쪽
習(익히다) - 배우고 실천한다면 더불어 즐거워질 수 있다.
익힐 습 자에 마음 심이 붙으면 두려워할 습慴이 되고, 불화가 붙으면 빛날 습熠이 된다.
옷 의가 붙으면 주름 습褶이 된다.
말씀 언은 붙어봤자 그대로 익힐 습謵이 된다.
깃 우羽 때문일까 어쩐지 '습' 자에 어린 새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는 것 같다.
날개는 가능성이자 희망이고, 두려움이자 불안이기도 하다.
비상할지 추락할지는 아직 모른다.
목숨을 건 비행처럼 배우고 익히는 일은 얼마간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4쪽 이 위험이 우리를 어디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 작가와 함께 생각해 보게 된다.
我(나 아) - 영화 <나를 찾아줘>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작품이다. 길리언 폴린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결혼 5주년을 앞두고 홀연히 사라진 아내를 찾는다는 내용의 <나를 찾아줘>는 각 인물들을 따라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이뤄져 있다.
경찰까지 포함하는 대중과 부부가 그 둘인데, 데이비드 핀처는 하나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융화시켜서 영화의 중심에 놓았다.
관객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역시 '대중' 파트다.
사실 두 가지 갈래의 위에서 <나를 찾아줘>를 이끌어가는 건 다름 아닌 제한된 사실을 너무나도 손쉽게 진실로 받아들이는 무책임한 '구경꾼의 눈'이다.
현대사회에서 이것을 조장하는 건 단연 진실보다 흥미를 전달하는 데 몰두하는 언론이다.
데이비드 핀처도 <나를 찾아줘>에서 그들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다.
동시에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일종의 실험을 하고 있다.
대중을 유린하고 현혹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반대로 진실을 알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절감한다.
닉이 아내를 찾는 중에도 찾아와 섹스한 장본인이 그걸 고백할 때는 요조숙녀처럼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나선다거나, 마지막까지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아내와 다정하게 인터뷰하는 닉, 남편에게 돌아가고자 에이미가 또다시 자작극을 벌이고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 모든 내막을 다 알고 있는 경찰과 변호사마저 닉을 도와서 진실을 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떠나는 장면 등은 구경꾼의 눈을 구경꾼의 눈으로 머물 수밖에 없게 하는 현실을 대변한다.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한 사람은 닉의 쌍둥이 남매인 마고였으나, 누구보다 친밀한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현실과 동화를 구분하지 않는 세상이다. - 출처 :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
용기란 자신의 능력과 스타일을 용인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그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존중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감을 해치는 일이야말로 비인간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199쪽
毒(독 독)
나는 글쓰기에도 기울기와 스며듦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유한 나를 상정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이지만 내 안에 숨 쉬는 수없이 많은 나들이 일일이 헤아리고 돌보야 거칠게나마 문장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독은 피하기 어렵다.
용기만이 망각의 위협과 죽음의 두려움을 건너 스스로를 긍정하며 새로운 그릇을 짓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 202쪽
5부 오늘도 무럭무럭
8일째 동장군이 기승을 피고 있다.
매년 겨울은 춥다. 한파 주의 보도도 매 겨울마다 내려지던 발령이니 특별할 것도 없다.
단지, 기상이변으로 8일째 한파가 지속된다면 걱정스럽긴 하다.
한파주의보 발령 문자도 자주 오다 보니, 특별한 동요는 없다.
겉으론 춥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속내는 덤덤하다.
한파주의보가 내리면 가능한 집안에만 꽉 박혀있다. 매년 나이만 먹어가니, 이런 날씨에 행동반경을 넓힐 이유가 없다.
빠른 걷기도 러닝 머신으로 해결하고, 집안 환기도 3분을 넘기지 않고 열었던 창문을 아예 잠가 버린다.
『고독할 권리』 책 속에도 '기압골의 영향으로 한파주의보'란 글이 있다.
그냥 덤덤하게 읽고 있지만, 작가의 마음이 들여다 보인다.
그녀에겐 '첫눈에 대한 추억'이 아프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글쓰기를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가 죽었다.
첫눈이 내리던 다음 날 앞집 사는 소꿉친구가 눈길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한쪽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여러 번 큰 수술을 받았지만 얼굴 형태가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했고, 한쪽 눈의 시신경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친구의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이사를 가게 된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친구의 모습을 작가는 잊지 못한다.
그림을 잘 그리던 친구였는데 불편한 팔과 되돌아오지 않는 얼굴로 어찌 지내는지. 작가 이근화는 첫눈이 내리면 이 친구가 생각난다.
나도 한때 첫눈을 낭만적으로 느끼던 시절을 지나왔다.
이제는 눈이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하면 출장길에 오르는 남편 '묵'부터 걱정한다. '안전운전'을 질리도록 잔소리처럼 되풀이하며 배웅한다. 나 자신도 외출을 가급적 피한다. 넘어져서 골절상이라도 당하면 내 허리는 견뎌내지 못하리란 생각을 한다.
이근화 작가처럼 청소년기 아픈 추억은 없지만, '기압골 영향'이란 일기예보가 뜨면 지구가 내달리고 있는 암울한 미래가 걱정된다.
한파, 폭설, 강풍, 무더위, 폭우와 장마 등이 오고 가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 강도와 균형이 조화롭지 못한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손녀 '꾸미'가 살아갈 세상이 안심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할미가 살아온 지구별처럼 삼한사온, 아름다운 사계가 제대로 작동할 것 같지 않다.
당신에게 날씨는 두려움입니까, 도전입니까, 로 시작하는 외국 자동차 광고가 있다.
날씨를 극복하고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최고급 차라고 말한다.
퇴근길 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켜 두는 보일러도 있다. 기술로 극복 가능한 것이 날씨이지만 모두에게, 언제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추위나 더위는 가난과 고통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것 같다. 송전탑 위의 찬 바람, 시위 현장의 땡볕 한 평 반짜리 방의 숨 막히는 더위, 바다의 수온과 수압 그런 것들 말이다.
라디오 뉴스에서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굴뚝에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잠을 잘 수는 있는지, 추위를 어떻게 견디는지 진행자가 조심스럽게 물었고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 이어졌다. 가스비를 아끼기 위해 보일러 눈금을 조심스럽게 조종하는 내 손이 부끄러워졌다. - 217쪽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이 산문집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 중 가장 보고 싶은 작품으로 손꼽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표작이다.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는 반전(反戰)과 자연환경에 관련된 메시지가 담겨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도 반전 메시지가 담긴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다이애나 윈 존스의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200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기술 공헌상을 수상했다. 특히, 히사이시 조 '인생의 회전목마' OST를 듣고 있으면, 하울의 성에서 소피와 함께 하늘을 나는 특별하고 감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 하울은 심성이 나약한 데 반해 성의 청소부가 된 소피는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다. 다양한 시공간을 여행하며 그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지키는 실제 주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기차와 군함, 포탄 등으로 상징되는 전쟁의 무시무시한 힘에 맞서는 것은 하울이지만, 상처 입은 하울을 보듬는 소피의 성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늙음과 추함을 거느리는 소피의 힘에 나는 더 관심이 간다.
한 번도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이 소녀의 대단한 용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다 같이 늙음을 끔찍이 여기고, 우리 사회는 젊음에 대한 동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고 하기에는 병적인 데가 있다. - 220쪽
강력한 마법의 힘을 지닌 하울은 현실을 피해 가려는 겁쟁이로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기애에 빠져있는 철부지 미소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심장(불 캘시퍼)이 몸 밖에 따로 존재하고, 그 불이 하울의 성을 움직인다.
소피는 성실하게 모자를 만들며 수동적으로 살아왔지만, 현실과 이상, 현재와 미래의 가치 판단이 명확하고, 젊음과 늙음의 이분법적 가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이 강한 소녀다. 소피는 젊음과 늙음을 제대로 바라보는 혜안을 지녔다.
소피는 하울의 계속되는 고된 싸움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그의 마음(심장인 불 캘시퍼)을 되돌려 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소피는 소녀(밤에 잠이 들면 소녀의 모습으로 변함)와 할머니 모습을 오가며 이뤄낸다.
수준은 소녀가 팔팔하고 용감한 할머니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대단해 보인다.
결국, 소피는 외모 콤플렉스까지 극복하고 하울과 진정한 사랑을 이룬다.
미야자기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은 바람(자유)을 타고 비행(이상을 향해) 한다.
소피와 하울도 움직이는 성을 타고 하늘로 날아간다.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진 하울은 심성이 나약한 데 반해 성의 청소부가 된 소피는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다. 다양한 시공간을 여행하며 그녀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지키는 실제 주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기차와 군함, 포탄 등으로 상징되는 전쟁의 무시무시한 힘에 맞서는 것은 하울이지만, 상처 입은 하울을 보듬는 소피의 성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비판의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늙음과 추함을 거느리는 소피의 힘에 나는 더 관심이 간다.
한 번도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이 소녀의 대단한 용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다 같이 늙음을 끔찍이 여기고, 우리 사회는 젊음에 대한 동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라고 하기에는 병적인 데가 있다. - 220쪽
강력한 마법의 힘을 지닌 하울은 현실을 피해 가려는 겁쟁이로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기애에 빠져있는 철부지 미소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심장(불 캘시퍼)이 몸 밖에 따로 존재하고, 그 불이 하울의 성을 움직인다.
소피는 성실하게 모자를 만들며 수동적으로 살아왔지만, 현실과 이상, 현재와 미래의 가치 판단이 명확하고, 젊음과 늙음의 이분법적 가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이 강한 소녀다. 소피는 젊음과 늙음을 제대로 바라보는 혜안을 지녔다.
소피는 하울의 계속되는 고된 싸움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그의 마음(심장인 불 캘시퍼)을 되돌려 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소피는 소녀(밤에 잠이 들면 소녀의 모습으로 변함)와 할머니 모습을 오가며 이뤄낸다.
수준은 소녀가 팔팔하고 용감한 할머니와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대단해 보인다.
결국, 소피는 외모 콤플렉스까지 극복하고 하울과 진정한 사랑을 이룬다.
미야자기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은 바람(자유)을 타고 비행(이상을 향해) 한다.
소피와 하울도 움직이는 성을 타고 하늘로 날아간다.
주름진 피부와 얼룩, 탄력 없는 몸매가 시간이 덧씌운 가면이라면 실체와 가면 사이에서 여전히 꿈과 현실이 섞이지 못하고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늙음이 젊은 나와 분리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으로서 시간을 꿈의 언어를 붙들어두는 걸 제안해 보다.
젊음과 늙음이 잘 어울려 서로 기대면서 내가 된다고 생각해 본다. 사랑하라.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라는 물음을 유지하는 것이 젊음/ 늙음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방법이 될 것이다. - 231쪽
6부 산책의 즐거움 혹은 괴로움
'엄마에게도 고독할 권리는 있다.'
작가는 천변을 끼고 사는 듯하다.
천변을 걷다 보면 머릿속이 비워지는 그녀의 그 느낌을 나도 잘 안다.
나도 천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살던 시절엔 혼자 정처 없이 자주 걷곤 했다.
종종 나 홀로 자전거를 타고 나서면 바람이 함께 동해 해주던 곳이다.
사계절 변하는 풍경에 스르르 스며들다 보면 몸은 건강해지는 듯했고, 마음은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하천변으로 벽천, 분수, 징검다리와 녹지 공간들이 언제나 반겨주던 곳.
천변을 따라가면 고방오리와 흰뺨검둥오리, 민물가마우지, 청둥오리, 메기, 피라미, 붕어, 잉어 떼를 만날 수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씩 안양천을 걷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집에서 천변이 보이질 않아서인지, 서울에서만큼 천변 산책을 즐기진 못한다. 건강이 그때만큼 좋지 않은 이유가 더 크겠지만.
건전한 소비를 하고 문화적 품위를 지키는 일로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웃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걸 알아야 오늘도 고독한 권리가 생겨날 것 같다. 아, 외롭고 싶은데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외로워야 한단 말인가. - 265쪽
고독할 권리는 이웃되는 연습을 통해 마련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숨 쉬는 수없이 많은 '나'의 주인이 모두 나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가진 감정이 모두 나의 것이라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이기심과 배타성이 모두 허구에 기반한 '나'의 요란한 운동성이라면 무기력과 무관심 또한 같은 데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들어와 앉아 있는 너의 일부들에 손을 뻗어 끌어당기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런 노력들은 개별적인 데서 출발하겠지만, 공동의 운명에 대한 낙관성 역시 일방적인 믿음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뢰감이란 안팎을 통해 구축되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일 텐데 마땅히 그러한 삶을 미래에 유예하지 않도록 하는 지금 여기의 규범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적인 보상만큼이나 잘 상상된 말이었으면 좋겠다. - 273쪽
작가의 말 -301쪽
백 년 동안의 고독
너무 시끄러운 고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검은 고독 흰 고독
고독의 발명
고도의 우물
죽어가는 자의 고독
고독의 권유
고독의 즐거움
맨해튼의 열한 가지 고독
남겨진 자의 고독
일요일의 고독
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니체의 고독
고독한 늑대의 피
고독하고 싶었지만 고독하지 못했던 시간들.
애초에 고독은 내 삶에 들어올 자리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5년간의 에세이 한 줌.
뿌연 먼지 속에 고독은 저 혼자 눈이 부시네.
외로운 사람들을 쉽게 알아본다는 것.
아마도 그게 내 장기가 아닐까.
가을이 짧아져서 걱정이다. - 2018년 12월 이근화
작가 이근화의 고독이 특별하진 않지만, 어떤 사람일지 나름 그려진다.
성실하다거나 수줍어한다거나 이런 표현을 끄집어내고 싶진 않다.
감히 누가 누구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성실한 사람도 어떤 상황에서는 의무를 등한 시 할 수 있고, 수줍은 사람도 어떤 사람 앞에서는 더 당당하거나 뻔뻔스러울 수 있다.
작가가 느끼는 고독에서 나의 젊은 날 혼돈이 새삼스럽게 진한 고독으로 되돌아온다.
이 책에서 '모르겠다' '좋겠다' 등 특유의 조심스러운 표현이 느껴지기도 한다.
늙음을 논하기도 하지만, 늙은 내가 볼 때 그녀는 아직 젊다.
젊지만 생각이 깊고, 나서진 않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소시민의 아픔에도 관심을 갖는다.
살짝 까다로운 모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속마음은 둥글고 따뜻하며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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