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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an 02. 2023

민족의 얼과 사무친 그리움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이중섭

사진출처 : KBS 예썰의 전당 사진 캡처

"나는 한국인으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6.25 전쟁으로 모두가 힘들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이중섭만큼 1950년대를 고통스럽게 견뎌내야 했던 화가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이중섭(1916. 09. 16 ~ 1956. 09. 06)은 '소'를 즐겨 그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다.

대표작 <황소>는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석파정 서울미술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석파정 서울미술관, 2017년 8월 촬영

석파정은 철종(25대)과 고종(26대) 때 중신 김흥근이 지은 별서를 흥선대원군이 집권 후 별장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정자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대원군이 '석파'라 이름 지었으며, 일명 삼계동 정자라 한다.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되던 한양 도성의 승경지로, 소계류와 거암 장송을 배경으로 지은 이 정자는 국내 원유 정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사랑채는 1958년 홍지동으로 이전되었으나, 본정 등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 - 이중섭 황소, 1953 / 소의 폭발하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흰 소, 1954


이중섭 '소'에서는 붓의 터치가 살아 움직인다.

선의 흐름으로 표현된 소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들여다볼수록 그의 놀라운 관찰력에 기가 눌린다.

깊고 묵직한 소의 시선이 강렬하다.

마주하고 들여다보면 순간 전율을 느낄 만큼 움찔하게 된다.

그가 그린 '소'는 비극의 시대를 견뎌낸 우리 민족을 닮았다.

대향 이중섭은 "나는 오직 조선의 소만 그리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고통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얼을 '소'에 투영한 뛰어난 예술가다. 이중섭은 자신만의 세밀한 관찰과 힘찬 붓의 터치로 역경을 딛고 전진하는 소의 형태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또 다른 표현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다양한 색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만의 세계 표현했다.

1900년대는 화가의 감정과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와 색을 재해석하던 '표현주의' 시기였다. 


이중섭은 1916년 당시 평남 평원군 조은면 송천리 부농 2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 4월,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文化学院, 분카가 쿠인)에 입학, 1939년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1921 ~ 2022)를 만난다. 마사코는 이중섭에게 단 하나의 사랑이며 유일한 기쁨이었다. 마사코 집안도 일본의 상당한 부유층이었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에도 끊임없이 '소'를 그리면 민족의 얼을 표현했다.


두 사람은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준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뜻.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남한으로 내려온다. 곧 돌아오리라 생각한 중섭은 자신의 작품을 원산에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남하, 부산에 도착하게 된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이중섭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고, 폐를 끼쳐도 어떻게든 갚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중섭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였다. 전시 상황에서 험한 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도 능숙하지 못했지만 가장으로서 막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한 시도 붓을 놓지 않고 예술혼을 불사르며 살았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년 / 가족 1952년, 삼성미술관리  소장


<가족>은 이중섭의 ‘가족 사랑’이 낭만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이중섭의 가족은 고난의 피난 생활 끝에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제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시절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한국에 남았던 이중섭은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길 희망하며 계속 그림을 그렸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이중섭의 미친 듯 사무치는 그리움을 20센티미터의 작은 종이에 연필과 유화로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에 강은 없다.

창가에 한 소년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창밖 뒤로 멀리 한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은 북에 두고 온 중섭의 어머니다.

내게도 아직은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의 그분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이중섭은 북에 두고 온 어머니뿐 아니라, 일본으로 보낸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의 아픔은 분단 조국의 상처이기도 했다.

천재 화가 이중섭은 긴 아픔을 간직하고 짧은 생을 너무 치열하게 살다 갔다.


1951년 1월 정부의 수용 피란민 소개 정책으로 부산을 떠나 제주 서귀포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반장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1.4평) 한 칸을 내준다.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약간의 배급과 게를 잡고, 부추 뜯으며 힘겹게 삶을 이어갔다.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 이중섭은 가족들과 행복하고 자유로운 11개월의 삶을 즐기며 작품 활동을 했다.


<서귀포의 환상>


이중섭은 제주도에 살면서 <서귀포의 환상>, <섶 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등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서귀포 그림들은 주로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바다, 물고기, 게, 아이들 등 제주도의 향토적인 소재들을 환상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마지막 행복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중섭에게 제주도는 전쟁을 피해온 피난처였지만, 이상적인 낙원이기도 했다.

이때 그린 작품은 대부분 따뜻하고 해학적이고 즐거운 이미지가 넘쳐난다.

서귀포시에 ‘이중섭미술관’이 있고, 그의 가족이 머물렀던 초가집을 중심으로 이중섭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출처: KBS '예썰의 전당' 사진 캡처 - 제주에서의 행복했던 일상이 담긴 작품 4점, 애니메이션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으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진다. 

이중섭은 폐결핵에 걸리게 된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때부터 가족의 재회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인다.

이중섭은 그림을 열심히 그려 이를 팔아 일본으로 건너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했다.


최악의 생활고를 홀로 견뎌내며 일본 가족들에게 보낸 이중섭의 자필 편지                                          


같은 해 7월부터 터 친구 구상의 저서 '민주 고발'의 표지를 정기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 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이때 마사코의 어머니(장모)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친분이 있던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 대신에게 부탁해 신원보증서까지 구해준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된다.


이중섭에게 그림은 곧 '삶' 그 자체였다.

판잣집 골방에 모여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 노동을 하다 잠시 쉬는 틈에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합판이나 맨 종이, 담배 쌌던 종이에도 그렸다.

물감과 붓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다.

그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 궁여지책으로 탄생한 새로운 기법이 그만의 특별한 '은지화'였다.



은지화는 은박지 위에 그려진 이중섭 예술혼의 결정체였다.

은지화는 쓰레기 더미에서 얻은 은박지 위에 뾰족한 물건으로 긁어서 그림을 그린 후, 물감과 담뱃재를 발라 색을 입힌 이중섭만의 특별한 예술세계다.

긁어서 그린 그림이어서 수정이 어려운 작품이다 보니, 이중섭의 열정과 자신감이 만들어낸 작품세계에 다시 놀라게 된다.

작고 가벼운 은지는 당시 흔한 재료였고 작품을 휴대하기도 간편한 장점까지 있었다.

이중섭을 위해 동료들이 은지를 모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이 은지화 세 점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관, 전시된 첫 한국 화가 작품이 됐다.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고, 그의 시신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친구인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이중섭의 가족들 및 친구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다.


망우리 공원 묘원 대향 이중섭 묘역, 2020년 11월 촬영

* 망우 묘지공원에는 일제 강점기 시인·승려·작가인 독립운동가 한용운, 아동문화 운동가 방정환,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세창, 화가 이중섭 등 유명 인사 23인이 묻혀있다.


*대문사진 : 대향 이중섭 작품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를 목계 이규남 서화각 작품으로 만났다. 2019년 8월 '물향기 산림전시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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