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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Mar 28. 2023

서울 망우역사 문화공원 묘역에 잠들다!

일제 강점기 비운의 천재 예술가 이인성과 권진규

서울 미래유산, 망우역사 문화공원은 600년 역사가가 살아 쉼 쉬는 아름다운 서울의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3월 26일(일) KBS 예썰의 전당에서는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명당 중 명당 '망우' 역사 문화공원을 집중 조명했다.

망우는 잊을 망(忘) 근심 우(憂), 근심을 잊는다.

낙이 망우(樂而忘憂), 즐김으로써 근심을 잊다는 의미를 전한다.

요즘 말로 Be Happy Don't Worry!


망우 역사 문화공원 묘역에 잠든 역사 문화 위인들 / 망우 공원 사잇길 지도 (2020년 7월 촬영)


망우역사 문화공원에는 50여 분의 역사 문화 위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살아있는 우리들이 즐겨 찾는 망우공원 사잇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영면에 든 근현대 위인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심 속 역사 문화 공원이다. 

망우 묘지공원에는 일제 강점기 시인·승려·작가인 독립운동가 한용운, 아동문화 운동가 방정환,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세창, 화가 이중섭,  등 문화 예술인들이 이 생에서 마지막 머무는 곳이다. 

이승과 저승이 이처럼 가깝게 편하게 느껴지는 장소도 흔치 않다. 



위창 오세창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다. 

그는 1928년 『근역서화징』을 발간했다. 

『근역서화징』은 신라부터 조서까지 담아낸 우리 서화가 1,117명의 작품이 담겨있는 한반도의 귀한 서화가 모음집이다. 



일제 강점기 비운의 두 천재 예술가, 

화가 이인성(1912~1950)과 조각가 권진규(1922~1973)도 망우공원 묘에 잠들어 있다. 


사진 출처 : KBS 예썰의 전당 사진 캡처




이인성은 이중섭과 어깨를 견주는 실력 있는 화가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인성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진학을 하지 못한 채, 정치가이자 화가였던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도쿄의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는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이인성은 20대 중반, 이미 자신만의 기법으로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는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들은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로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우리나라 수채화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가을 어느 날 (1934)

'가을 어느 날'은 제13회 조선미전 특선 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우리 시골 풍경을 감상적으로 그린 향토적 작품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이 작품에 대해, 일제강점기 관전 심사위원의 취향을 고려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민족 정서를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엇갈린 평가가 있었다.


정물 (1934)

작품 '해당화'는 광복 직전인 1944년, 해방에 대한 갈망과 은유적인 표현이 담긴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해당화는 5월~7월 사이에 개화하는 꽃이다. 

그런데 화면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입은 옷은 초봄이나 늦겨울쯤에나 어울릴 만한 차림새다.  

봄이 너무 일찍 와 해당화 꽃은 만발했지만, 식민 강점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1950년 11월, 천재성을 발휘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이인성은 귀가하던 중 통금시간에 걸려 경찰과 시비가 붙게 된다. 

그의 집으로 쫓아온 경찰은 이인성에게 공포탄을 겨누었지만 실탄이 날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허망하게 떠날 수도 있는지, - 오발탄으로 인한 끔찍한 사고였다.

사고로 너무 빨리 잊혔던 천재화가 이인성을 KBS 예썰의 전당에서 가깝게 만날 수 있었다. 





권진규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부호인 정주(定周)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흙을 만지기 좋아하였고 손재주가 뛰어났고, 1936년 함흥 제1보통 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 사업체가 있는 춘천에서 병약한 몸을 요양하면서 1942년에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히다치 철공소로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때 동경 사설 아틀리에에서 미술 수업을 받는다. 

1944년 조국으로 밀입국, 서울에 정착했다가, 1947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8년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권진규는 부르델의 제자로 일본 조각계의 지도적인 인물이었던 시미즈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시미즈는 부르델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권진규 또한 부르델(Bourdell, E.)에 매료되어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로댕으로부터 이어온 조각의 생동감이 권진규의 작품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주로 인물이나 말, 닭 등의 동물상을 흙으로 구워서 제작했다. 

가난한 유학생이 선보인 천재성은 로댕의 계보를 잇는 한국인 조각가로 탄생한다. 



권진규의 대표작 '지원의 얼굴'

'BTS' RM은 권진규의 찐 팬이다. 

RM은 실제 권진규 작품인 '말'을 소장하고 있으며, 권진규 탄생 100주년 전시회에 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대여해 주기도 했다. 


소을 즐겨 그린 이중섭, 새를 자주 그린 김환기, 말을 많이 그린 권진규, 이 세 사람은 예술적으로 이어져 있다. 


권진규는 작가의 정신적인 구도 자세와 사물에 대한 인지를, 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이 아닌 직감적이고 원초적인 상태로 파악해서 서 표현한 조각가다. 작가와 대상의 정신적인 합일을 집약적으로 추구, 우리나라 근대 조각계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썩지 않는 테라코타 기법으로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작품을 만들었다. 


*테라코타(terracotta): ‘점토(terra)를 구운(cotta) 것’. 벽돌, 기와, 토관, 기물, 소상 등을 점토로 성형()하여 초벌구이한 것. 선사시대 이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에트루스크의 우르카가 제작했다고 하는 『베이오의 아폴로』(로마, 빌라 줄리아 미술관), 그리스의 타나그라 인형, 고대 중국의 도용() 등이 모두 이것이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대사전(용어 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손(1965) / 정물(1953) / 권진규 자화상


십자가에 매달리 그리스도 / 자각상(1970)


권진규는 1971년 명동화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초대 개인전 형식으로 제3회 개인전이 열렸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과 육신의 병마에 시달리던 중 그는 1973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74년에 명동화랑에서 1주기 추모 유작전이 열렸다.

권진규는 살아생전 그의 독보적인 작품성을 다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간 천재 예술가다. 

권진규의 팬인 BTS RM을 통해 듣는 권진규의 마지막 순간, 

'인생은 공(空) 

파멸'

사람들에게 잊혔던 천재 조각가 권진규는 KBS 예썰의 전당을 통해 뜻밖에 우리 곁에 가까이 파고든다. 

그가 느꼈을 텅 빈 허무함, 파괴되어 사라져야만 했던 순간이 아프고 뜨겁게 울린다. 


한국의 두 천재 예술가 이인성과 권진규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작품으로 온전히 살아있을 것이며, 망우역사 문화공원에서 우리가 찾아오길 늘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망우 묘역에는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다 간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과, 아동문학가 강소천도 묻혀있다. 

두 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단짝이다.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다가 망우 묘역에 잠드셨으니,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동무다. 



소파 방정환은 방정환은 1899년에 서울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어려운 소년기를 보냈다. 

1917년에는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딸과 결혼했다. 

919년 3.1 독립 선언서를 나누어 주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보성 전문학교를 나온 뒤 1920년 일본 도요 대학에서 아동학을 연구했고, 국내로 돌아온 뒤에는 아이들과 청년을 위한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린이의 마음은 신선 같다'(동심 여선, 童心 如仙)라고 했다. 

돌무덤 형태의 방정환 묘비에는 '동심 여선'이라고 쓰여있다. 이묘는 '동무들이'세웠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방정환 선생의 동무들 아니겠나! 

손녀 꾸미도, 아들딸도, 할미가 된 나도 이분들의 동무로 어린이 시절을 보냈으니, 딱 맞는 표현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추리소설 작가로도 활동했다. 대표작으로는 '칠칠 단의 비밀'이 있고, 실감 나는 동화 구연까지 했다. 

그는 어린이의 대통령이며, 어린이의 참뜻을 알려준 사람이다. 

'어린이'는 늙은이, 젊은이와 등등한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 잡지 '어린이' 1923년 발간 / 꼬부랑 할머니 동요

1923년 어린이 잡지에 게재된 방정환의 소감

- 소년의 지도에 관하여

"어린이는 결코 부모의 물건이 되려고 생겨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기성 사회의 주문품이 되려고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네는 훌륭한 한 사람으로 태어 나오는 것이고 저는 제대로 독특한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강소천은 방정환을 잇는 어린이를 위한 활동가다. 

그가 작사한 100여 편 넘는 곡들은 지금까지 많은 어린이들이 부르고 있다. 

1940년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으로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 

강소천은 그 암울한 시대인 1937년~1945년 8월까지 한글 연구 및 문한 수업을 했다고, 그의 이력서에 적고 있다. 


그는 1952년 어린이 잡지인 『새벗』과 『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1953∼1955년 한국문학가 협회 아동문학분과 위원장, 1960년 아동문학 연구회 회장, 1962년 한국문인 협회 이사, 『아동문학』의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아이 생활』, 『신소년』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했다. 

같은 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요 「민들레와 울 아기」가 당선됐고, 「길가에 얼음판」, 「얼굴 모르는 동무에게」, 「호박꽃과 반딧불」, 「봄비」,  「닭」 등 우수한 동요·동시를 다수 발표했다.

「닭」이나 「호박꽃 초롱」에 담긴 동요·동시는 전형적인 음수율에 구애됨이 없다. 

고도의 시적인 표현을 보면 강소천의 예술적 재능을 알 수 있다. 그는 관조와 깊은 사색을 통해 그만의 개성 있는 작품을 표현했다. 


강소천의 동시집 / 호박꽃 초롱에 실린 백석의 서시


강소천은 백석이 영생 고보 영어 교사로 있을 때 가르쳤던 제자다.

그는 1930년부터 동시를 쓰기 시작, 1941년 첫 동시집 『호박꽃초롱』을 간행하게 됐다. 

이미 시단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스승 백석에게 서시를 부탁했고, 백석은 동시의 분위기에 맞는 서시를 써 주었다. 이 시에는 백석의 시에 대한 생각, 동시를 이해하는 자세, 제자에 대한 애정이 모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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