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사이로 내리는 햇살이 찬란했다.
6월 초록빛에 눈이 부셨다.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도서관 계단 곁에서 들꽃들이 배시시 웃었다.
시간은 머뭇거리며 온화한 바람결처럼 머물다 갔다.
그는 서른 번째 새봄을 영영 마주하지 못했다.
겨우 스물아홉 번째 겨울과 작별을 고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고 싶진 않았을 텐데.
그는 인생을 증오했을까?
사랑했을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4쪽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34년 전 3월 7일의 고단했을 하루를 시작도 하기 전,
그는 까만 하늘 속으로 날아갔다.
창문 밖 서성이던 검은 그림자도 산산이 부서져 함께 사라졌다.
서로 만난 적도 없는데,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
착각일까?
망상인가?
그저
그가 쏟아낸 무수한 단어들이 공손한 바람처럼 늘 스쳐가고 있었을 뿐이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을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83쪽 '나리 나리 개나리' 중에서)
기형도 시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2019년,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출간됐다.
그의 유고 시집 『잎 속의 검은 잎』에 담긴 시들과
『기형도 전집』에 실린 미발표 시 원고들 중 97편을 한 곳에 모아 기획한 작품이다.
그는 잊히지 않았고,
그의 단어들은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중단되지 않는 그의 추억은 더 많은 독자들에게 바람처럼 공기처럼 스며들었다.
시인 기형도는 익명의 독자들과 함께 지금도 살아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5쪽 『잎 속의 검은 잎』 시작 메모)
우리는 기형도의 길로 나섰다.
지금 걷는 길은 기다란 옛길로 이어져있다.
"거리를 한 개의 끝으로 뛰어다닐 때의 해 질 무렵
건물마다 새파랗게 빛나는 면도 자국.
이것이 희망인가 절망일 건가 불빛 속에서
낮게 낮게 솟아오르는 중얼거림
깨지 못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미리 깨어 있는 꿈은 비극이다.
포도 위에 고딕으로 반사되는 발자국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음향을
듣는가 자네 아직도 꿈꾸며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140쪽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중에서)
나는
오늘도
길
위에서
중얼거린다.
그의 단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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