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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Sep 10. 2023

인연

세월은 사철 저마다 아름답고, 특별하며,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던 시절은 갔다.

출퇴근 지옥철을 타본 사람이라면, 떠밀려서 스치는 건 옷깃만이 아니어서 괴롭다.

밀려서 스친 것을 인연이라 부를 사람은 없다.

바삐 오가며 어쩌다 같은 공간에 머물렀을 뿐이니, 서로 악연일 필요도 없지만,

이런 스침을 인연이나 관계라 할 순 없다.

'정말, 그중 단 한 명의 인연도 없었을까?' - 낭만은 아니지만, 소심하고 억지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겪어보아야 안다.

물도 건너 보아야 안다고 했다.

태풍의 위력도 지나가야 그 실상이 제대로 드러난다.

참모습이 소문만큼 대단한 위력을 과시하지 않을 때도 가끔 있어 고마울 때도 있었다.

미리 했던 걱정이나 고민이 허망할 때도 있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다.

사노라면, 이런저런 일들이 모여 얽히고설킨다.

복잡하게 꼬여 괴롭기도 하고, 어쩌다 한순간에 풀리는 행운도 아주 가끔 일어난다.


지난주 목요일 여고 동창 친구 한 명이 다녀갔다.

아직 햇살도 따뜻한 11시 30분경 우리는 천안역에서 만났다.

서부역 쪽 엘리베이터 입구는 조용했다.

친구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면 나타났다.

우리는 고층 아파트 사이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일단 키 작은 분수대 곁 빈 의자에 앉았다.

카톡 연락을 하고 지냈지만, 거의 3년 만에 만난 얼굴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의 눈을 먼저 바라보았다.

얼마 전, 녹내장 수술 한 달 후 별안간 혈압이 높아져서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던 터다.

복용 중이던 혈압약도 들질 않았다고.

동네 의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하던 중, 의사가 한쪽 눈만 힘겹게 수술을 마치더니, 안압이 높아져서 다른쪽 눈은 더 이상 수술을 진행하지 못하겠다고 했단다. 나머지 오른쪽 눈은 큰 병원에 가서 수술받으라면서.

의사의 실력을 탓하기보단, 차라리 의사 자신의 몸도 사리면서 환자를 더 힘들게 만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친구와 동네 안과 의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친구는 대학병원을 예약하고, 한 달 정도 기다려 전문의를 만났다.

높아진 혈압부터 치료하고 9월말 백내장 수술을 받을 예정인데, 처방된 약을 복용하고 혈압은 원래대로 잡혔다니 안심이 됐다.

한쪽 눈의 수술을 남겨두고 있었고, 당뇨 전단계라며 걱정이라고 했지만, 얼굴은 좋아 보였다.


나도 20여 년 전 동네 치과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오른쪽 아래 사랑니 한 대에서 충치가 발견됐다.

치과의사도 빼길 권했고, 나 역시 입안 가장 뒤쪽에 있는 치아를 몇 번씩 충치치료하는 번거로움이 싫었다.

예약을 하고 며칠 후, 발치하러 갔다.

중년 의사는 내 사랑니 주위에 호기롭게 마취주사를 여러 곳 꽉꽉 놓고, 무시무시한 기구를 들고 사랑니를 흔들고 비틀고 잡아당기고 난리를 쳤지만, 사랑니 한 대를 끝내 빼질 못했다.

오히려 마취약으로 한동안 입안이 얼얼했고 사랑니 주위가 부어올랐다.

대학병원에 가서 빼라는 말 한마디를 남겼을 뿐 사과도 없었다.

발치 비용도 다 청구해서 받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때 나 지금이나 의사 앞에 놓인 환자는 그냥 작은 존재였다.

나쁜 x라고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용기도 없었고 일단 내 상황이 걱정스러워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풍납동 아산병원 치과에 예약했다.

병원엔 금세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사랑니의 부기가 빠져야 발치가 가능했다.

발치 일을 예약하고 며칠 후 다시 병원을 찾았다.

사랑니 발치에 따른 모든 부작용은 환자가 일체 책임진다는 서약서 내용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의사가 사랑니를 마취하고 펜치 같은 무서운 기구로 치아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는데, 단번에 치아가 뽑혔다.

의사도 나도 서로 놀랬다.

동네 치과에서 있었던 상황을 미리 설명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쉽게 빠지는데 동네 의사 양반은 있는 힘 없는 힘 다 쓰는 것 같았는데 왜 발치를 못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송파 1동에 있던 이 치과는 다시 가질 않았다.


우리는 '효자동 솥뚜껑' 돼지고기 전문점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자주 오던 곳이어서 느긋하고 편하게 삼겹살과 목살 600g과 공깃밥 1개를 시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우리 가족 3명이 와서 먹으면 푸짐한 정량이어서 당연히 남길 줄 알았다.

서빙하는 분께도 남기면 포장해 가겠다고 미리 말하고 주문했다.

나는 친구를 위해 생전 하지 않던 고기를 구웠다.

심지어 서서 굽고 뒤집고 먹기 좋게 자르기까지 했다.

남편 '묵'이나 아들이 하던 작업이었는데, 나도 잘할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외식할 때, 고기를 굽긴 처음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주부들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친구도 당연히 고기를 구워본 적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친구들이 집에 오면 바지락칼국수나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었는지도 모른다.

밑반찬과 마늘, 상추와 깻잎도 떨어지기 전에 날라다 담았다.

그런데 2 사람이 3인분을 싹 다 먹어치웠다.

친구가 맛있게 먹어줘서 기분이 좋았다.

서빙하던 분도 둘이 600g을 다 먹은 것을 보며, 놀라면서 웃었다.

'효자동 솥뚜껑'에서 커피 쿠폰을 줘서, 편의점 아메리카노 2잔을 뽑아 들고 집으로 왔다.

참외와 키위의 달달한 맛을 즐기며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달달하게 나눴다.


우리 인연은 오래됐다.

10대부터 이어져온 그 긴 세월,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면 지내왔다.

친구는 저녁 7시가 돼서 돌아갔다.

저녁식사를 권하는 내게 배가 불러서 못 먹겠다고 강하게 거부하니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냈다.

주말부부로 지내는 나, 평소 집에서는 거의 말이 없을 수밖에.

친구의 말에 대꾸만 해줬는데도 밤에 목이 아파서 생강차를 마시고 뒤척이며 잤다.


9월 2번째 주가 지나간다.

9월이 찾아든 지 그리 오래 지도 않았으니, 화단을 지키는 나무들은 여전히 무성한 녹음을 유지하고 있다.

한낮 더위도 만만치 않지만, 아침저녁으론 확실히 바람결이 다르다.

세월은 사철 저마다 아름답고, 특별하며,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저마다 다 귀한 사람들은 비껴갈 수 없는 세월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살아간다.

늘 푸를 순 없다.

항상 젊을 수도, 언제나 건강할 수도 없다.

친구 얼굴 속에서 여고시절 뵙던 그녀의 어머니 모습이 보였다.

나 역시 돌고 돌아와 서있는 곳이 주름진 내 어머니 계시던 곳과 다르지 않았다.

딸 얼굴에서 그리고 손녀 꾸미의 모습에서 늘 푸르던 날을 떠 올리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인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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