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그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쓰는 시인 문태준
서정 시인 문태준에게 문장은, 개개의 사물과 사람과 생명이 고유하게 간직한 꺼지지 않는 빛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산문집에는, 작가가 '관계의 경험을 통해' 수업한 것들이 실려있다.
문장을 얻는 일을 기쁘게 여기는 작가의 그 마음이 우리에게 첫 문장의 빛처럼 들어온다.
그에게 빛은 제주 돌밭, 해안과 오름 숲, 해녀와 대양의 어부, 귤 밭 농부, 산인(山人), 이웃은 물론, 은빛 비행기, 여객선, 섬들에서까지 예외 없이 비쳐왔다고 한다. 작가의 꺼지지 않는 그 빛이 우리에게 그대로 스며든다.
연잎 같은 마음 - 17쪽
바깥 세계는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와 작용한다.
시를 쓰는 작가는 내면이 활동하도록 애쓴다.
문태준 작가의 내면엔 고유한 사물, 만났던 사람, 작고 큰 자연, 세계의 일면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의 언어들은 내면에서 움직이며 늘 신선한 상태에 있다.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 악사였던 우륵이 남긴 이 말은 슬퍼하지만 과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도를 넘기지 않는 감정을 의미한다.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넘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다.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우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오래
걸어온 것들은
모가
닳아 있다
이윽한
눈빛
연잎 같은 마음
안으로
향기가 스며
단단하고
은은하다 - 권갑하 시인의 시조 <인사동>
연잎 같은 마음은 안온함을 지키고 너그럽게 감쌀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시인의 일 - 23쪽
문태준 시인은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그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
시를 쓰는 일은 매번 새롭고 두려우며, 차갑게 외롭고 고통이 있다.
시의 첫말을 내기는 참 어렵다.
그의 시는 보고 듣고 살던 삶으로부터 비탄처럼 태어났다.
부드러운 자연 - 26쪽
자연의 세계는, 자연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유연함과 공유의 세계다.
삶의 가치와 처지를 함께 나눈다.
자족하는 시는 움직이지 않는다.
관계를 경험하고 사유하는 좋은 시는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세계를 움직이게 한다.
산같이 물같이 - 29쪽
흐르는 물속에 암자의 풍경 소리 속에 밤의 달무리 속에 자라는 식물 속에 그날그날의 구름 속에 저 가랑비와 실바람 속에 당신의 감탄사 속에 넣어줘 - 문태준 시인의 <매일의 독백>
우리가 작은 암자의 풍경 소리처럼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 <법구경>
오늘 하고 싶었던 일을 애써서 해 - 33쪽
잊을 수 없는 일과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지만, 오늘의 시간에 오늘의 일을 '애써서' 하는 것도 중요하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오늘의 소소한 일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거나, 또 스스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일은 간단하고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항아리 1 - 35쪽
마음의 항아리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불안과 자책, 분노와 눈물, 욕심도 담겨 있지만, 자애와 절제, 만족과 웃음도 담겨 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제의 그림자와 내일의 기대도 담겨 있다.
마음의 항아리를 들여다보는 봄날이다.
매화나무의 보람 - 38쪽
박재삼 시인은 시 <강물에서> 아지랑이가 가만히 솟아 아득해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눈물의 때를 보냈던 옛 시간을 회고한다. 그 곤란의 시간이 경과한 후 맞이하게 된 봄을 "물오른 풀잎처럼 새삼 느끼는 보람"이라고 했다.
혹독한 추위의 지속을 매화가 감내하듯이, 곤경을 맞은 우리도 멀리 바라보며 조급하고 불안한 당장의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 겪게 된 고통의 원인을 바로 보아서 대처하고 처방해야 함은 물론이다.
빛을 가지고 새가 왔다 - 43쪽
네 한숨은 꽃잎의 한숨.
네 목소리는 백조의 노래.
네 눈빛은 태양의 빛남.
네 살결은 장미의 살빛.
사랑을 잃은 내 마음에
생명과 희망을 던져준 너.
사막에 자라는 꽃송이같이
내 생명의 광야에 살고 있는 너. - 스페인 시인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라의 <카스타에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다.
사랑의 씨앗은 뭇 생명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다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에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인간으로서 짊어진 삶의 무게를 받아들여라.
참고 견디어 살다 보면 언젠가는 기쁨 일이 생긴다" - <<숫타니파타>> 중에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은 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 돌을 뚫는 일에 비유되기도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다.
머리 위에서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 - 칸트
칸트는 우주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와 자신의 마음을 잘 제어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다.
온화한 대자연 - 49쪽
흰 구름 무더기 속에 삼간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저절로 한가롭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다. - 나옹선사의 시
그는 단순하고 작은 것에서 행복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들은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 법정 스님
시작하는 때에 남풍이 불어오네 - 53쪽
당신은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세요
조심스레 내려가
가만히 앉으세요
그리고 숨을 쉬세요
부드러운 둘레와
밝은 둘레와
입체적 기쁨 속에서 - 문태준 시인의 <꽃>
세상 모든 사람의 내면이 꽃의 내부 공간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시다.
시인은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속은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자신의 내면을 부드러움과 밝음과 기쁨이 감싸게 한다.
겨울에서 봄으로 - 57쪽
겨울의 끝자락은 봄바람에 밀려난다.
봄을 맞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갱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직 어려운 때에 있는 사람은 이 순간을 스스로 단련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때가 가고 나면 지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을 일이다.
아침에 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저녁에 한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고 - 59쪽
뿌리는 무엇과도 친하다.
꽃나무와 풀꽃들의 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엉켜 있다.
냉이가 봄쑥에게
라일락이 목련나무에게
꽃사과나무가 나에게
햇빛과 구름과 빗방울이 기르는 것은 뿌리의 친화력 - 문태준 시인의 <뿌리>
사실 모든 존재는 독립적이면서도 그 뿌리는 연결되어 있다.
사물을 깊이 있게 관찰하면서 마음 모아 숨 쉬고 미소 짓기를 서원합니다.
자비와 연민을 기르고 기쁨과 평정의 수행을 하고 중생들의 고통 이해하기를 서원합니다.
아침에 한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저녁에 한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기를 서원합니다.
단순하고 맑은 정신으로 살면서 적은 소유로 만족하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를 서원합니다.
가볍고 자유롭기 위하여 근심과 걱정을 놓아버리기를 서원합니다. - 제주 참선 재단 '원명선원' 금강 스님의 취임 법회 서원문
저자는 이 문장을 매일 소리 내어서 읽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퇴근할 때, 풀 뽑고 돌 캐고 지렁이를 흙 속으로 돌려보내고 서로 엉킨 뿌리들을 볼 때도.
생명들이 푸릇푸릇 자라는 곡우 즈음에.
그대는 여름보다 더 아름답고 부드러워라 - 65쪽
붓다의 탄생 장면은 인상적이다.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나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사자처럼 말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내 오직 존귀하다. 온통 괴로움에 휩싸인 세상을 내 마땅히 안온하게 하리라."
이는 내가 존귀하듯이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존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것의 쇠락은 우연에 의하거나 자연의 변화 때문에 회피하기 어렵지만, '그대'는 고귀하고 평등하고 자유롭고 자비심이 충만한 본래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많은 이가 감미롭게 마시게 하라 - 70쪽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맘을 그렇게나 먹어야지.
살기에 이러한 세상이라고
꽃 지고 잎 진 가지에 바람이 운다. - 김소월 시인의 <낙천>
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고 난관이 닥치는 때가 자주 있다.
참으로 살기에 쉽지 않은 때가 있다.
시인은 염세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즐겁고 좋은 때가 곧 오겠거니 기대를 하고 살아볼 일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꽃 지고 잎 진' 때는 하강 국면일 테지만, 꽃도 잎도 없는 가지에 설령 바람이 불어오더라도 살기에 어려움이 지극히 많은 때를 통과하고 있다고, 이 역경의 시기도 머잖아 지나가리라고 조금은 위로도 해볼 일이다.
착하고 예쁘게 - 76쪽
따스한 봄바람으로, 부드러운 봄볕으로, 은여우의 꼬리털로, 당신의 꽉 닫힌 가슴, 활짝 열어젖히고 싶은,
시여 내일이여 역사여 - 이은봉 시인의 <내일이며 역사여>
우리는 거칠거나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운, 또 훈기가 있는 마음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
선한 사람은 대개 마음이 담박하다.
아첨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솔직하다.
선한 사람은 마치 조용하게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무슨 일이든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 너무 애를 태우며 살지 말자.
느긋함과 참을성과 배려심을 온전히 갖게 되면 좋겠다.
달과 같은 환한 얼굴 - 85쪽
오늘은어제의미래
내일은오늘보는꿈
누군가푸른하늘을약속하고있다
초록빛들판도약속하고있다
이제부터태어날노래에맞춰서 - 시인 다나카와 슌타로의 <미래의 아이>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채 쓴 이 시의 시구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묻어 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곧 푸른 하늘, 초록색 들판이다.
머잖아 태어날 노래라는 의미다.
미래 시간에 대한 부드럽고 밝은 생각이 드러난다.
다나카와 슌타로는 애니메이션 <우주소년 아톰>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주제가 작사가이기도 하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한다.
가감 없이 감정을 덧씌우지 않은 문장을 말한다.
부정적인 감정에 묶이지 않으면 어두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내 얼굴빛도 화사해진다.
소박한 행복 - 90쪽
덜 조급해하고, 조금 의연한 척도 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척도 하면서 산다면, 우리 내면의 평화는 일렁거리고 찰랑거릴 뿐 깨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촌스러운 음식을 먹으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잠깐씩 각별할 것 없는 평범한 때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소박한 행복의 내용일 수도 있다.
애련 - 94쪽
물과 땅에서 피는 초목의 꽃 가운데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지만,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각별히 사랑했고, 당나라 이후에는 세인(世人)들이 모란을 사랑했다.
나는 연꽃을 유독 사랑하는 바, 연꽃은 진흙에서 자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가운데는 텅 비어 있고, 바깥은 곧으며, 덩굴로 자라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않는다. 연꽃의 그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하게 서서 깨끗하니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하거나 갖고 놀 수 없다.
생각하건대, 국화는 은자(隱者)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하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君子)라 이를 만하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것을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바 드물고, 나와 함께 연꽃을 사랑할 이는 또 누구일까?
모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많을 것이다. - 북송 유학자 주돈의 <애련설>
국화와 모란, 연꽃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면서 연꽃의 성품에 대해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 글은 연꽃에 대한 찬탄의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녀야 할 내심의 내용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친절 - 98쪽
종교의 핵심은 친절이고, 먼저 필요한 것은 자비이다.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깨달음은 약속되어 있다. 명료하고 간단한 답변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친절을 베풀고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것도 포함된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안온을 얻기 바라는 것도 친절이요, 자비심이다.
풀과 돌멩이 -100쪽
문태준 시인에게 돌은 어떤 마음처럼, 어떤 존재처럼, 그동안 잠잠하게 덮여 있었던 내심과도 같이 여겨졌다. 돌 하나하나는 보석을 숨긴 돌이었다.
돌탑이나 특별한 형상을 이룬 돌무더기를 볼 때는 유연(有緣)에 대해 사유했다.
유연은 인연을 이르는 것이다.
돌과 돌이 만나 아래위로 받치고 얹히면서 집적을 완성한다.
각각의 몫을 다하면서 조화의 세계를 만든다.
시인은 풀로부터는 악착을 보았다.
끊어지지 않고 발생하는 것들을 보았다.
감각의 사용이 제어되지 않으면 풀처럼 되리라고 생각하며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도무지 풀은 솟지 않는 곳이 없었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방심하는 사이에 다시 돋았다.
풀은 곧 들짐승 같은 마음이자 존재처럼 여겨졌다.
문태준 시인은 풀 뽑는 노동을 통해 자꾸자꾸 자라려는 탐욕을 관조한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슬픔이나 두려움이 적고, 마음이 평온하고, 노심초사하지 않고, 다투지 않게 된다.
풀과 돌멩이를 다루는 시간도 우리에겐 수행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주적 율동 - 106쪽
"시간은 미래를 창조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파괴하는 신이다. 시간은 자신을 완성시키려 하는 자, 자기의 영원한 미래를 창조하려 하는 자의 것이다" - 불교계 대표적인 시인 한승원 소설가의 말
이 말은 수행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려는 사람만은 시간이 파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영원한 미래를 창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존재가 나처럼 신성하다고 여기면, 구분과 차별도 한순간에 끊어질 것이다.
수행도 마음을 가꾸는 일이며, 정신의 맑음과 신성을 가꾸는 일일 것이다.
언덕과 물줄기를 함께 구르며 비슷해진 돌들처럼 - 110쪽
내 곁에 너는 살고 있다, 나같이.
움푹 꺼진 어둠의 뺨 속
돌 하나로.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 - 파울 첼란의 시 <돌 언덕>의 일부분
이 시는 돌이 많은 언덕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각각의 돌로서 쉼 없이 구르며 둥글게, 더 비슷하게 된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우리는 서로의 곁에서 사랑으로 구르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이 기대하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을 과장 없이 정확하게 일러주는 겸허함, 인간을 축소함으로써 인간이 볼 수 있는 영역을 더욱 확장해 주는 겸허함, 한 인간의 현재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그가 깨칠 수 있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경지를 통해 인간의 가치를 보는 겸허함. -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모리스 마테를 링크가 쓴 산문 중에서
존재의 오솔길을 걷다 보면 겸허하고 소박한 진리의 아름다움과 깊이에 눈을 뜨게 된다.
우리는 보편적 차원의 겸허함을 지녀야 한다.
한 인간이 지녀야 할 겸허함은 허황한 행복의 기대를 걷어낸 것이고, 진정한 겸손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마음 안에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이며, 맹목적인 단념이 아니라 내일의 시간이 있음을 알아서 인간으로서의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별을 않는 것은 아집과 대립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원만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대등하게 바라보고, 우리가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동일한 자성을 가르친다.
청정한 깨달음의 마음을 누구나 공히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이라면 다른 사람을 괄시하는 일을 그칠 수 있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해치는 일은 나를 차별하고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언덕과 물줄기를 함께 구르며 닮아가는 돌들의 관계가 우리의 관계이다.
제주 밭담 - 116쪽
오, 돌.
어느 때나 푸른 새로
날아오르랴.
먼 위로 아득히 짙은 푸르름
온몸에 속속들이
하늘이 와 스미면,
어느 때나 다시 뿜는 입김을 받아
푸른 새로 파닥거려
날아오르랴. - '돌의 시인'으로 불리는 박두진 시인의 <돌의 노래>
무정물인 돌이 미래의 시간과 희원(希願)을 갖게 한다.
돌은 우주 생명 에너지의 응축물로 거듭났다.
사람들아
옷깃을 여미고
배우자
바위
영원한
부동의 자세
항상 청순한
그 호흡을 - 조지훈 시인의 <바위송>
조지훈 시인은 <바위송>을 통해 이렇게 칭찬하며 감탄했다.
돌담을 쌓을 적에 쓸모없는 돌은 하나도 없다.
각진 돌은 각진 돌 대로, 둥글거나 자잘한 돌은 또 그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다.
돌을 쌓는 사람이 각각의 돌에 적절한 용도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돌은 우리 인간의 초상이기도 한 것이, 개개의 인격들이 모여 더 큰 범위의 모임과 관계를 만들어가듯이 개개의 돌들도 모여 원담을 이루고, *잣성을 완성하고. 집담과 밭담이 된다.
*잣성: 제주 지역의 중산간 목초지에 만들어진 목장 경계용 돌담
바다와 올레길 - 123쪽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 윤동주 시인의 동시 <반딧불>
아이의 동심이 묻어 있는 짧은 동시다.
캄캄한 밤에 반딧불이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빛을 "부서진 달조각"이라고 노래한 그 감각이 놀랍다.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아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 정지용 시인의 <바다>
이후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명편을 발표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 뱀떼같이
재재발랐다
정지용 시인은 푸른 물결이 빠르게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을 도마뱀 떼의 긴박한 움직임에 빗대 표현했다.
바닷길을 느리게 걷다 보니 그냥, 지나치던 풍경이 자세하게 눈에 들어온다.
불안하고 답답하던 마음도 평온을 되찾는다.
저자는 '외로운 인격'에 친구가 생긴 느낌이었다고 한다.
느리게 걷는 일은 자연의 생명들을 생생하게 느끼는 일이요, 신선한 생기를 호흡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자애(慈愛)가 생긴다.
장마와 폭염 -129쪽
저자는 장맛비와 폭염 사이를 오가며 살면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름은 흐르는 물가가 좋아 그곳서 살아라
우는 천둥을, 줄렁줄렁하는 천둥을 그득그득 지고 가는 구름
누운 수풀 더미 위를 축축한 배를 밀며 가는 물뱀
몸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불은 계곡물
새는 안개 자욱한 보슬비 속을 날아 물버들 가지 위엘 앉는다
물안개 더미같이, 물렁물렁한 어떤 것이 지나가느니
상중(喪中)에 있는 내게도 오늘 지나가느니
여름은 목 쉬에 크고 묵직한 물주머니를 차고 살아라 - 문태준 시인의 <칠팔월>
더위를 피하는 법 이제 알았네
고요가 극에 가면 마음이 비어
푸른 술은 석 잔을 기울였는데
개인 뫼는 육여(六如)와 흡사하구나 - 추사 김정희의 여름 시편
육여는 불교에서 말하는 육유(六喩)를 일컫는다.
존재의 무상함이 곧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갯불과 같다는 것이다.
추사는 비 그친 여름 산의 변화무쌍함을 이 여섯 성질과 다름없다고 보았다.
여름 산의 계곡과 봉우리에서 일기가 수시로 변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되 그 관찬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함께 느꼈던 것이다.
인심 - 135쪽
풀꽃과 바람과 여름의 둥근 잎에 오롱조롱 매달린 빗방울과 갠 하늘
미농지 같은 저녁에
방울벌레 우는소리
(아, 그게 다 뭐라고!)
세상에서 가장 어수룩해 보이는 그 사람은
방울벌레 울음을 공중에서 몰래 떠
천으로 짜 지은 주머니에 넣어서 가네 - 문태준 시인의 <방울벌레 우는 저녁에>
"세상에서 가장 어수룩해 보이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이다.
소나기 그친 후에 다시 우는 방울벌레의 청아한 울음소리를 듣는 기쁨이 적지 않다.
비록 여름날의 풀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지만, 시골의 후한 인심만은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의 환경 - 141쪽
우리는 단독적인 개인이지만 사회적인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영향 관계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고달픔은 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그릇되면 다른 것들도 그릇되게 된다. 연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을 비방하는 것은 나를 비방하는 것이요, 남을 믿지 못하는 것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가 종교적인 차원의 자아가 될 때 나의 행복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게 되는데. 이러한 기도에는 우리가 하나의 유기적 생명 공동체에 살고 있고, 또 선의로써 서로를 돕는 조력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모든 존재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인종, 종교, 국경, 신분 등을 초월해서 질병으로부터 생명들을 지켜내는 일에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손 편지 - 146쪽
작가가 손 편지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조언의 차원이 아니라 나무 곁에 있는 허공이 되는 것, 바람에 길을 내주는 허공이 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이 일을 잘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눌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가로채고 참견하고 부정하곤 한다. 그 사람이 스스로 말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게 하지 않는 것이다.
'잘 듣는 귀'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손 편지를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있는 확신은 없지만,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일 뿐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아무도 조언을 바라지 않는다. 사실(고통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가을빛이 쌓여간다 - 153쪽
계절도 하나의 공간이다. 계절을 사는 일은 새로운 가옥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이 가을이라는 시간도 하나의 살림 공간일 테다. 이제 바람의 끝에는 서늘한 기운이 있다.
바짓단처럼 낮은 바닥으로부터, 땅으로부터 꽤 선선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 가을의 공간에 귀한 빛이 내린다.
산다는 것
지금 산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른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그대와 손을 맞잡는 것 - 다니카와 슌타로 <살다>
우리의 생명은 "대지의 사랑방"에 잠시 묵고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 시는 우리 삶의 의미를 해석했다.
산다는 것은 지금을 사는 일이다.
갈증이 있지만 때로 햇살 눈부시며, 흥겨운 노래와도 같은 것이며, 서로의 공감을 늘려가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달과 귀뚜라미 - 157쪽
캄캄한 돌 속에서 푸른 이끼 돋아나시네
환해진 하늘 쪽에서 흰나비 날아오시네
앞집 할머니는 무화과나무 아래 쪼그려 풀을 뽑으시고
젖은 풀들 속에서 풀벌레 우는소리 젖지 않은 채 떨리며 나오시네 - 문태준 시인의 <여름 소낙비 그치고>
햇살은 사물마다 특유의 색을 입힌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근심이 없으면 그것보다 더 큰 평온과 행복도 없다.
문태준 작가가 기다리는 가을 달 또한 어둠에 기대어 빛을 낸다, 마치 귀뚜라미가 침묵에 기대 울음소리를 내듯이. 가을 달을 보는 일은 단순하게 "달이 휘영청, 떴구나!"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드러나는 것의 배경이 되는 것, 뒤편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가을 달은 밝음과 맑음과 깨끗함과 무욕, 어둠을 배경으로 한 빛, 침묵을 배경으로 한 소리 등의 의미를 갖는다. 가을 달은 더 환하게 가을밤을 건너간다.
풀짐을 진 아버지는 어디로 가신 것일까 - 163쪽
아버지는 풀 짐을 지고 오시네
암소는 풀 짐 진 아버지보다 앞서 집으로 돌아오네
아버지는 암소에게 물을 먹이고
아버지는 암소에게 풀을 먹이네
암소의 워낭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네
초저녁의 물결 위로 흘러오네
아버지의 어둑어둑한 하늘 속으로 들어가네 - 문태준 시인의 <아버지와 암소>
잘그랑거리는 워낭 소리까지 그대로 담긴 한 폭 풍경화같이 편안한 시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하루하루가 다를 정도로 기운이 떨어지셨다는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시인의 애틋한 마음 소리까지 함께 울려온다.
순금의 시간 - 169쪽
가을은 점점 깊어간다.
하늘은 맑고 높다.
수풀은 마르고 풀벌레 우는소리는 쓸쓸하고 가냘프고 애처롭다.
나무 그늘은 한층 선선하다.
코스모스나 구절초 등 가을꽃이 핀 곳엔 가을 느낌이 난다.
무르익은 과일들은 달콤함과 향기를 완성한다.
농가에서는 작물을 수확하고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작가의 글은 산문도 시처럼 운율이 담기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보인다.
가을은 떠나가는 것을, 마지막 생명의 빛깔을 보여주고 그 화려함을 거두는 시간이다.
사람의 몸도 변해간다. 가을처럼.
젊은 시간은 지나간다.
병이 오기도 하고, 사람을 잃기도 한다.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도 없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중략)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가는 것을 바라본다. - 아르헨티나 시인,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글 중에서
그는 1955년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됐다. 아주 영예로운 순간들이었다.
그는 장서가 가득한 그 속에서 수많은 책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
그러나 이듬해 보르헤스는 시력을 거의 상실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번민이 있었지만, 몸의 쇠락과 무너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심경을 글로 섰다.
가을의 시간은 지혜가 익는 때이고, 보다 성숙해지는 때이다.
수확의 때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때이므로 비옥한 계절이라고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중략)
살고 살리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미래를 생각해 낸다.(중략)
신은 신성하고 불변의 것이기에
인간만이 자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멀리 전방을 내다보는 한 그루의 나무이다. -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
한 잔의 차를 끓여, 혹은 따뜻한 커피를 받아 앞에 놓고, 마르고 야위어가는 것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뿌리와도 같은 그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계절이다.
바람은 영겁의 시간 속을 불어온다 - 174쪽
바람은 영겁의 시간 속을 불어온다.
바람을 맞는 물과 돌과 땅거죽엔 시간이 각인된다.
장구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물이 뒤집히고 눈발이 솟구치고 구름장이 찢긴다.
달과 별이 떨린다.
이 맵찬 바람 속의 풍경들 그리고 한차례 바람이 다 지나간 후 섬의 중심에 의연히 앉아 있는 새하얀 산, 한라산.
이것이 나에겐 참다운 풍경으로 비친다. - 강요배 화가의 글
이 글을 읽으면, 강요배 화가의 그림 속에서 바람이 자주 역동적으로 등장하 까닭을 이해하게 한다.
그림을 통해 우리의 이 삶 또한 불어 가는 바람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게 괸다.
바람처럼 불어오고 흩어지면서 우리의 경험이 집적된다.
존재 또한 바람의 문향이 각인된 하나의 물이요 돌이요 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연산 가을 상품 - 181쪽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 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풀들이 놀래어 소리 한다 소리들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드득 후두둑 들리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 최하림 시인의 <가을날에는>
가을의 시간에는 소리가 잘 들린다. 사방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에 모두 예민해지는 때이다.
최하림 시인은 자신이 다른 것들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무단으로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써도 그 걸음 소리에 메뚜기들이 놀라 날아오르고, 벌레가 울고, 마른풀들이 흔들린다. 존재들은 서로 주고받는 영향 관계에 있으므로,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저쪽 사과밭에서 사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저녁때 석양도 성큼성큼 발을 크게 떼어 놓으며 지상으로 내려온다. 가을에 우리 감각은 예민해진다. 무심하게 여겼던 시간의 흐름에 마음을 얹어 상념에 젖기도 한다.
때로는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동안 질주하듯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삶의 속도를 조절한다.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도 질문해 보게 된다.
다섯 수레의 책 - 186쪽
'오거서(五車書)'는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책을 일컫는다.
장자의 친구였던 혜시는 소장한 책이 다섯 수레에 이를 만큼 다독가였다.
당대 문학가였던 한유는 아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면서 아래 시 <부독서성남시(符讀書城南詩)>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장마 걷히고
서늘한 바람이 들녘에 불어온다
이제 등불을 차츰 가까이해서
책을 펼쳐볼 만하다.
한유는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아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성장하면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져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따라 마치 맑은 냇물과 흙탕물 도랑의 차이만큼 사람됨이 달라진다면서 독서를 권장했다.
관심 - 190쪽
한 가지 일을 수십 년 동안 해온 장인들의 경우, 관심을 갖고 매일매일 그 일에 에너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실력을 더 예리하게 만들고 숙련도를 높였고 이들은 삶을 비교적 단순하게 살려고 애쓴다.
부처가 녹야원에 머물며 '의왕'에 대해 한 말씀 중, 최고의 의사는 네 가지 일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1) 이런저런 갖가지 병을 잘 아는 사람
2) 병의 근원을 잘 아는 사람 - 병이 바람으로 인해 생겼는지, 벽음(癖飮)에서 생겼는지, 침에서 생겼는지, 냉에서 생겼는지, 현재 일로 생겼는지, 기후에서 생겼는지를 아는 사람
3)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
4) 병을 고친 후 미래에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하는 사람
이 비유를 보면, 우리가 일에 대해 가져야 할 관심은 그 내용이 상당히 넓다.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지속되어야 한다.
관심이 깊을수록 그 일에 있어 왕(王)의 지위에 점차 가까워진다.
하얀 씨앗 - 197쪽
정신분석학자, 사회심리학의 개척자인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무기력이 분노와 공포, 신경증 같은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면서 무기력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감탄하는 능력을 키우고,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하고, 피하지 말고 갈등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티베트 마음 수련법에서는 긍정적인 마음의 씨앗을 '하얀 씨앗'이라고 부른다.
하얀 씨앗을 심으면 사려 깊음, 인내, 활력, 용기, 보살핌과 같은 것을 얻게 된다.
풍경과 응시 - 201쪽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변 옛집에 산다. 열두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72년을 한 나무 밑을 지나다니며 살았고, 72년을 똑같은 산을 바라보며 살았고, 72년을 같은 얼굴을 보고 살았어요. 한 번도 질려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심심함을 견디는 일이 진짜 힘들었어요. 너무나 심심하다 보니가 모든 것들이 자세하게 보였어요. 새가 날아가는 것도, 눈이 오는 것도, 비가 오는 것도, 할머니들이 농사짓는 것도 자세히 보여서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내 시로 들어왔어요."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참다 보면 바깥이 상세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바깥을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도 함께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매 순간을 스스로 분주하게 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속이 항아리처럼 깊어진다는 말이다.
별다른 일도 아닌 일을 자꾸 만들면서, 몸과 생각의 소음을 만들면서, 안달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드는 건 문태준 작가만이 아닐 것이다.
가슴속에 새겨지는 별과 시 - 206쪽
한 사람의 내염에 시가 들어 있다는 것은 얼마니 멋진 일인가!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이 시에 한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며, 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시를 떠올려 생기와 활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문학작품, 한 권의 책은 책 그 이상이다.
작품이 낭독되는 순간, 작품의 문장들은 읽은 이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촉발한다. 그 내면을 썩 괜찮게 가꾼다.
거칠고 독단적인 마음을 너그럽고 비옥한 상태로 바꿔놓는다.
시골 버스를 기다리며 - 209쪽
나는 빈 광주리 같은 가슴이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는 여기 그냥 이대로 서서 바람을
맞으며 그들이 잠시
우리 기억 속으로 들어와 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최하림 시인의 <저녁 바람>의 일부
"빈 광주리 같은 가슴"이라는 시구에는 허전한 듯, 한가한 듯, 쓸쓸한 듯한 고요가 느껴진다.
우리들은 가슴에 너무 많은 것들을 담아놓고 사는지도 모른다.
저자 문태준은 삶이 너무 분주하지 않은지, 잡념이 많지 않은지, 한 인간으로서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는 일에 소홀함이 없는지를 돌아보고 있다.
그는 일부러 멀리서 오는 시골 버스를 탄다. 한 시간에 한차례 오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차량과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고개를 들어 구름이 이동하는 것도 보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바라본다. 일정한 모양이 없이 때로는 헝클어진 상태로, 때로는 잘 빗겨진 머리카락처럼 온다.
가을을 살면서 지나가는 시간과 사람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기에 가을은 너무 알맞은 시간이다.
은하 건너 별을 두고 살 듯 - 219쪽
모과 몇 알을 얻어서 넓고 큰 그릇에 놓으면 빈방에 향기가 햇빛처럼 내린다.
향기가 따뜻하다. 모과 향은 이 겨울의 시간에 가만히 앉는다.
구름이 흘러 다녀도 하늘은 움직임이 없고,
배가 나아갈 뿐 강둑은 옮겨 가지 않네.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서 환희와 슬픔이 생겨나 리오. - 편양선가(조선 중기 스님)가 지은 선시
구름이 골짜기에서 생겨나고, 또 뭉치고 흩어지며 이동해 산등성이를 넘어 멀리 가더라도 하늘은 변한 것이 없이 그대로다. 배가 물을 따라가더라도 양쪽의 강둑은 제자리에 있다.
우리 마음은 어떠한가.
본래 고요하고 맑은 성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니, 기뻐하고 우는 일은 구름과 배의 일에 다름이 아니다.
사람이 그리웠던 한 해를 보내며 - 226쪽
한 해가 저물어간다.
석양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다.
해를 넘기고 새해를 맞는 때이지만, 해넘이와 해맞이로 달라질 것은 없다.
긴 여정에서 바라보면 수많은 언덕 가운데 하나의 언덕을 넘어서는 것뿐이다.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 지내온 얘기를 서로의 앞에 부려놓을 수 있는 그런 새해였으면 좋겠다.
첫 마음 - 232쪽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이 조바심으로 너무 서두르지 않고, 맑은 시야로 가슴 깊은 곳에서 사랑을 길어 올리고, 조용하게 내면을 응시하고, 비상도 꿈꾸며 영원에 대해 생각하는 너른 안목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들의 사랑이 살아 우리들의 혈관을 흘렀으면 좋겠다.
수선화와 매화 - 236쪽
한파에도 불구하고, 한라산이 거느리고 있는 협곡과 오름과 평원에서 수선화가 꽃봉오리를 맺고 또 터뜨리기 시작한다. 집집의 돌담 아래에 이 수선화를 심어놓고 수선화의 개화를 완성함으로써 오싹한 한파를 몰아낸다. 어느새 남부 지방에서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펄펄 나는 새야, 내 뜰의 매화나무에서 쉬어라
향기도 진하니 은혜로워라, 어서 오너라
여기에 올라 여기에 깃드니, 네 집이 즐거우리라
꽃이 아름다우니, 열매도 많으리라. - 다산 정약용의 '매화꽃 소식' 시
이 시는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만, 계절 감각 또한 돋보이는 시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좀 이른 봄의 노래다.
어머니의 만학 - 241쪽
여든 살 즈음에 글과 그림을 배운, 스무 분의 순천 어머니들이 펴낸 그림일기 책이 있다.
가난 때문에 사는 일에 숨이 가빠서 배우지 못하다가 연세가 드셔 서야 글을 배우고, 더 용기를 내서 그림까지 그리셨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어머니들의 사연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다큐 영화 <시인 할매> <칠곡 가사니들>이 개봉돼 화제가 됐다.
만학도 어머니들의 글과 그림은 감동 그 자체였다.
사박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 윤금순(1937년생) 시인의 <눈>
기교를 버린 소박한 시였다.
삶의 기록과도 같은 시였다
"잘 살았다 / 잘 견뎠다"와 같은, 스스로 넉넉하다고 느끼고 만족하는 시구는,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꽉 채우는 듯 북받치는 문장으로 받아들여진다.
혼자의 시간 - 249쪽
혼자의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단지 고립의 시간을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혼자의 시간은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코로나 대유행이 몰고 온 삶의 변화가 어쩌면 우리 사회의 내일의 모습으로 점차 뿌리내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불교 경전인 <<출요경>>에서 "먼저 자기 몸을 바로 하고 난 뒤에 남을 바로잡아라. 자기를 바로 한 사람을 '가장 수승한 자'라고 일컫는다."라고 설하신 것도 수행의 처음이 혼자인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있다는 뜻이다.
옛사람의 시간 - 253쪽
고통과 사랑의 체험은 문학이 다뤄온 아주 오랜 화두 같은 것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삶 자체가 고통과 사랑이라는 체험의 연속이다.
이 체험은 인생이라는 책의 갈피 속에 끼워져 있다.
우리는 이 고통과 사랑의 체험을 통해 보다 자아가 성숙하게 되고, 또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넓혀간다. 이 고통과 사랑의 체험 한가운데에는 옛사람의 시간이 있다.
항아리 2 - 258쪽
항아리는 내놓았을 때에도 뭔가 넉넉해 보이고 인심 좋아 보이지만, 땅에 묻었을 때에도 까탈스럽지 않고 푸근하다. 어릴 적 항아리 속에 머리를 넣고 여러 소리를 내보면, 항아리 내부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산울림보다 훨씬 울림이 컸다. 곧바로 목소리를 받아주고, 굵은 저음의 어른 목소리로 만들어준다.
항아리는 하나의 우주에 견줄 만했다. 항아리에는 고운 햇살이 담기고, 바람이 들어가고, 빗방울과 눈송이가 담긴다. 닭과 꿩이 우는소리와, 강아지 짖는 소리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환호의 음성이 함께 담긴다. 물이 쌓여서는 하늘을 담아내고, 이동하는 구름이 수면에 비쳐 보이기도 한다. 바람이 격렬하게 회오리처럼 돌다 나가는 때가 있고, 땡볕에 항아리 속이 끓을 때가 있다. 혼자 달빛을 받으며 가을밤에 쓸쓸히 앉아 있는 때도 있다.
항아리는 하나의 우주다. 우리 마음도 항아리와 같아 내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마음의 보호자 - 263쪽
스스로 이해하는 마음 챙김은 마음에 무슨 생각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이다.
고통스럽거나 유익하지 않은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러한 생각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서 그러한 생각들을 물리친다. 마음 챙김을 '마음의 보호자'라고 일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 챙김을 통해 마음을 유연하게 하고 생기와 긍정의 힘을 회복한다.
덕담 - 265쪽
말은 씨가 된다. 입은 마음의 말을 표현하므로 늘 조심해야 한다. 입속에 도끼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정월에 새해 할 일과 뜻을 세우고 어른들로부터 예지의 덕담을 들기도 했지만, 언제든지 덕담을 들어 마음에 새길 수 있다. 매일매일 삶으로부터, 또 그 삶의 구체적인 내용인 고통과 기쁨으로부터 덕담을 들을 수 있다. 한 톨의 씨앗도 훌륭한 덕담의 제공자가 될 수 있다. 버킷 리스트처럼 덕담의 목록을 만들 수도 있다.
동쪽 언덕과 야인 - 270쪽
겨울이 지나고 있다. 겨울비가 내리거나 싸락눈이 치고 수시로 돌풍이 분다.
눈보라도 맞고, 새파란 추위도 겪는다. 제주의 겨울이 혹독하기는 하나 풀빛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텃밭이나 귤밭에는 푸른 풀이 남아 있다.
비에 씻긴 동쪽 언덕에 달빛 맑은 밤인데
성(城) 사람들 다 돌아가고 나 홀로 걷네
언덕길 울퉁불퉁하다 불평하지 마시게
탕탕 울리는 지팡이 끄는 소리 좋으니 -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의 시 <동파(東坡)>
'동파'는 동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소동파의 호 '동파'는 이를 따서 지었다. <동파>는 돌이 많은 버려둔 땅을 얻어 일구다 쓴 시로 전해진다.
유배를 와서 동쪽 언덕에 땅을 얻어 설당을 지으려고 개간을 하다 탄식하며 쓴 이 시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시로 보인다. 불만족과 불평과 원망을 이겨내고 순리를 아는 사람으로 비친다.
문태준 시인의 글은 산문도 시어처럼 곱다.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책에는 작가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장들이 다양한 주제로 반짝반짝 빛을 내며 담겨있다.
제주 바다와 바람과 햇빛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의 글을 통해 흡사 여러 장의 풍경화로, 제주를 품은 한 편의 영화로, 산문에 음률이 담긴 노래로, 이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어울린 한 권의 책이었다.
봄여름 가을겨울을 천천히 지나온 느낌은 은하를 건너온 듯도 했고, 빈 광주리 같던 가슴에 별과 우주가 담긴 듯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