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는 50대 앨리스의 이야기
“지금이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야”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는 주인공 앨리스 말이 영화가 끝나도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맴돈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루게릭 투병 중이던 ‘리처드 글랫저’ 감독의 유작이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감독의 마음이 앨리스 상황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신이 겪고 있던 상황과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독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함께 했을 것이다.
<스틸 앨리스>의 공동 각본가이자 연출가였던 글랫저 감독은 투병생활 중에도 마지막까지 이 작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워시 웨스트 모어랜드’ 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만들었다.
당당한 여성 앨리스는 컬럼비아 대 언어학 교수, 사랑받는 아내, 1남 2녀 엄마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최근, 그녀는 자꾸 깜박깜박 뭔가 잊어버리는 횟수가 늘어간다. 평소 사용하던 단어도, 약속도 자주 생각나질 않는다.
혼자 걱정하던 앨리스는 병원을 찾게 되고, 희귀성 알츠하이머라는 판정을 받는다. 유전성이란 말에 더 크게 상심하는 앨리스 모습에서 강한 모성애가 느껴진다
기억을 잃어가는 극한 상황에 처하면서도 소중한 기억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꿋꿋하게 치매와 맞서 나가는 과정은 보는 이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기억상실 팔찌를 차고 생활하는 앨리스는 행복했던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앨리스는 자신의 노트북에 - 나중에 집에 아무도 없을 때, 2층 침실 서랍에 둔 약을 물과 함께 모두 복용하고 침대에 누워 자면 된다. -라고,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나비>라는 새 폴더에 저장하고, 약을 서랍에 몰래 보관한다. 자살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치매란 뇌의 노화나 외부 원인으로 뇌의 기능이 저하되어 나타나는 정신장애의 일종으로 통상적인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장애를 초래할 정도로 기억력과 지능, 학습능력, 언어기능, 문제 해결 능력, 지남력, 지각, 판단력, 주의 집중력 등 여러 인지 기능의 장애가 있는 상태.
① 초로기 치매(65세 이하 발병)는 알츠하이머 치매 34%, 혈관성 치매 18%, 전두측두엽 치매 12%, 알코올 연관 치매 10%, 레비소체 치매(후두엽 부위 손상) 7%, 헌팅톤 병(신경계 퇴행성 질환) 5%, 기타 14%이다. 엘리스는 초로기 치매로 90%가 가족력, 주로 40~60세에 발병한다. ②노년기 치매(65세 이상 발병)는 알츠하이머 치매 54%, 혈관 치매 16%, 기타 30%이다. -국제 치매예방협회 교육자료 일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남겨진 소중한 시간들 앞에서 온전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당히 삶과 맞서 나간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라던 그녀는 남편 존과 그의 안식년을 함께 즐기고 싶다. 큰 딸 애나의 쌍둥이 출산, 아들 탐의 졸업 등을 모두 지켜보고 싶다. 작은 딸 리디아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LA에서 극단을 운영, 직접 배우로 활동하며 산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자기 일에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 앨리스는 그런 리디아에게 항상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권하곤 했다.
앨리스는 치매 협회 강사로 초대받아, 자신의 상황을 밝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녀의 감동적인 고백에 가족들도 눈시울을 붉히고, 청중들도 감격 어린 표정으로 박수를 보낸다.
큰딸 애나는 쌍둥이를 건강하게 출산한다. 남편 존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직장을 옮기게 된다. 존은 앨리스를 남겨둔 채, 미네소타에 있는 새 연구소로 떠난다. 존이 떠난 빈자리에 작은 딸 리디아가 찾아와 앨리스 곁을 지킨다.
리디아는 자신이 일군 LA 보금자리를 버려두고, 엄마를 돌보고자 뉴욕으로 온 것이다. 독립적인 리디아야말로,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조발성 치매는 진행속도가 빠르다. 앨리스는 점점 기억을 상실해 가고, 작은 딸 리디아는 그런 엄마와 함께 뉴욕에서도 열심히 살아간다.
리디아가 엄마에게 읽어준 책의 마지막 구절, ‘영원한 상실은 없다. 고통스럽지만 나에게는 여정이 있으니까.’ 리디아가 엄마에게 묻는다. “이 책이 어떤 이야기인지 아시겠어요?”라고, 앨리스는 이미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힘들게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리디아가 되받는다. "맞아요! 사랑에 대한 얘기예요."라고.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속도와 앨리스의 변화를 화면 가득 자세히 담는다. 실제 알츠하이머 병을 경험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점점 부석 부석 해지는 앨리스의 지친 얼굴, 헝클어진 머리 모양, 항상 가장 편한 옷차림, 어눌해지는 행동 등이 안타까운 병의 진행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과정이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당당했던 앨리스의 삶과 존재 이유가 가감 없이 그대로 그려져,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표현주의 화가 윌리엄 어터몰렌의 자화상(2006. 10. 28. SBS 뉴스)에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된다. https://bit.ly/3Hg4AmJ
치매는 과거의 기억을 어떤 순간 멈추게 하거나 많은 부분을 싹 지운다. 그리고 먼 기억 한 자락에 집착하게도 한다. 안타까운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20년 후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된다.
내 부모님과 시아버지께서는 치매가 찾아오기 전에 이승과 작별하셨고, 올해 93세 되신 시어머니는 아직도 정신만큼은 또렷하시다. 신체적 노화로 어려움은 겪고 계시지만 이조차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임을 인지하고 계시니 더 이상 바랄 바 없다.
아침부터 활력 넘치는 손녀 꾸미를 바라보며 마냥 행복하기만 하던 내 마음 한편에 서서히 드리우던 그림자(노화와 치매)를 들여다 보기도 했지만, 어느새 귓가엔 세젤예 꾸미 웃음과 옹알이 소리만 가득 찬다.
“그래! 나는 지금, 이렇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