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로 달려?
마음에 찍어둔 자리에 이력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감일이 2월 28일까지였다. 개인적으로 마감일을 오늘 17일로 정하고 온라인 서류를 넣으려 했는데, 다른 자리들만 남아 있을 뿐 내가 준비했던 자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충원이 다 되어서 일찍 마감을 했다고 한다. 아 그럼 선착순?이라고 미리 알려주던가. (어딘가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허점은, 남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혼자만 모르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야무진 개인 비서가 옆에서 좀 챙겨주면 삶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
일반적인 이력서가 아니라, 마치 사전 인터뷰처럼 대여섯 개의 질문이 있어 공을 들였었다. 잘 써서 보내고 싶었다. 그게 실수였다. 의미를 크게 부여하니... 늘 그렇듯...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고 기회는 기회대로 날렸다. 다소 허탈했다. 마감이 2월 말이라, 다른 것을 먼저 챙기고 여유를 부렸던 바보.
화가 난 바보는, 그동안 미루고 있던 메일 한 통을 보내 버렸다.
받는 이: 그림책 공작소 대표님.
아이가 태어나기 전, 서너 개의 글을 모아 투고했었으나,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소식 없는 걸 보면, 결과를 물어 뭐할까. 그래서 이번엔, 투고 아니니 걱정 마시고, 그림책 한 권 만드는 강의 한 시간만 부탁드린다고. (강의료 드린다고 했는데, 지불할 능력은 될 수 있기를...)
원고와 돈을 주면, 책으로 찍어내어 줄 곳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책만 만들겠다는 장인정신으로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을 고민한 분하고의 퀄리티는 비교불가. Olga의 그림을 위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주어야 후회가 없을 듯하다.
근무시간: 8am -5pm.
직장에 근무하며 마감을 한다 생각하면, 글로 달려볼 수 있을까?
그렇게 달리다,
누군가,
'작가님! 대박이 나서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라며 인터뷰를 요청하면,
'가고 싶은 곳이 일찍 마감을 했어요, 조기 마감 당했던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되었네요.'라고 해야지.
라며 혼자 생쑈를 한다.
아는 동생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보라고 했다. 돈을 벌고 싶으면 어디에서든 입소문 타는 강사가 되던지, 추구하는 철학을 실현하고 싶으면 돈을 포기하던지...
성실하게 다작하는 웹소설 작가가 한 편의 베스트셀러 작가보다 수입이 더 많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재벌집 막내아들> 원작자 산경님은 웹소설 작가는 평소에 한 번 잡으면 오천자를 쓰라고 한다. 전업이든, 부업이든 겸업이든 어떠한 환경일지라도 이 분량을 지켜내라고 한다. 5천 자를 듣는 순간, 글로 달려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이 통할 방법을 찾으며 오천 자씩 달리다 보면... 완주하는 그 무언가가 하나는 있지 않을까.
웹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앉은 채로 5천 자를 달리다간 쥐가 날 수 있으니... 조금씩... 속도를 높여보자 했는데... 한 시간 넘게 쓴 것이 400자가 못 된다. 너무 느린가? 신랑은 많이만 쓴다고 좋은 게 아니라며, 퀄리티에 충실하라고 했다. 많이 쓰고 퇴고를 잘해야 퀄리티도 좋아진다고 반박했더니, 수긍했다. 그리고, 잠시라도 모니터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면 이 때다 싶게 한 마디 한다.
'Hey, just write!'
'Okay okay.'
그런데 뭘 쓰지?
알콜의 힘인가. 오늘은 머릿속이 하얗다.
음주 writing 중이다.
하얀 종이 바라보며 막막해하는 아이가 된 느낌이다.
Photo: C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