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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Mar 04. 2023

당기면 당겨진다

당기자

작년 여름, 일본에 사는 조카가 다녀간 이후에도 네 살 아들은 가끔씩 히라가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 연습했던 회화를 떠올리다 기억이 가물거리면, 옆에서 알려주는 것도 아들이었다. 일본어 경험치를 연장해서 조카와 일본어로 대화를 할 정도면 좋겠다 생각하다가, 또 한편으론 이미 이중언어를 하고 있는 아이라, 일본어까지 적극적인 맘으로 달려들진 않고 있었다.


이주 전쯤, 아들은 빨간펜을 들고 갑자기 마룻바닥에 일본어라면서 끼적이기 시작했다. 글자 모양이 그럴싸해 사진을 찍어놓고 칭찬해 주었더니, 기세 등등 하게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필력을 과시했다. 써놓은 글자들을 보면서, 일본어를 배워서 아들이 어깨너머로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냥 흐르고만 있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제목이 맘에 들어 집어 든 책은, 이론 물리학자 박권 교수님의 양자역학에 대한 것이었다.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고 극찬된 책이었는데, 당시 내겐 심오함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며 반납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와의 만남은 이미 일어날 일이었을까. 8년이 넘게 살아오던 이 지역에서 일본인의 대화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과일가게 앞에 아들 또래와 조금 더 어린 동생, 두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일본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아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들이 만나 놀 수 있을까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연락처를 주었다.


일본어를 이중언어로 쓰는 여자아이와 영어를 이중언어로 쓰고 있는 남자아이가 한국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유치원을 멀리 다녀 동네에 또래 친구와 어울릴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동갑내기라 더 반가웠다. 생일이 9개월이나 빨라 저보다 키가 큰 여자 아이를 멀찌감치 보고, 아들은 전에 없이 낯가림을 심하게 하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초대를 해놓고, 놀이터 끝과 끝에서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아이들은 아이들. 점차, 노는 반경이 겹치고 말이 섞이고 함께 놀이를 하면서 급기야 아들 입에서, 또 만나고 싶다는 아쉬움이 먼저 터져 나왔다.


일본 엄마는 집에서 아이와 거의 백 프로 일본어로 소통한다고 했다. 어린이집에 가면서 한동안 일본어를 쓰려고 하지 않아, 오히려 더 열심히 일본어로 소통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아이는, 엄마와 대화할 때는 일본어를 쓰다가, 내게 말을 할 때는 바로 한국어로 존댓말을 써주었다. 얼핏 듣기에도 두 언어 모두 아이에게 안정적으로 정착이 된 듯 보였다. 영어 학원도 보내고 있다고 하니, 아이가 잘 소화한다면 얻게 될 언어의 자유로움이 기대된다.


일본어를 배우기로 했다. 그녀를 만나서 간단한 소통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막연히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일본어를 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나타났으니... 이것은 아들에게 일본어도 선물로 주라는 계시가 아닐까. 앞으로 지속되는 만남에선, 일본어와 영어로만 소통을 해보려 한다. 재미있을 것 같다. 차후의 선택은 아들이 하게 되더라도... 일단 해보는 거다.


중국인 신랑을 둔 친구에게 연락해, 한, 중, 일 모임을 한 번 열자고 해야겠다. 우연일까. 모두 동갑내기다.


런던에서, 그리스 아빠와 필리핀 엄마를 둔 동료가 있었다. 다양한 국적, 인종이 어울려 사는 런던이 제일 편하다고 했다... 그리스에 가도 완전한 그리스 사람이 아니고, 필리핀에 가도 온전한 필리핀 사람이 아닌... 그 어디쯤의 경계에 있는 이방인의 느낌이 든다고 했었다.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눈동자 색깔이 정말 특이한 스웨덴 남자를 만났는데,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부인의 출신 국가가 모두 달랐다. 런던에서 만난 동료와는 다르게,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는, 다양함과 글로벌한 배경을 뿌리 삼아 어디에서든 잘 살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의 국적은 이 세상이라고 말할 정도니... 너무 간 거였나.


아무튼, 아들도 지혜롭고 밝게... 글로벌하게 커 갈 수 있는 기운을 당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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