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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Apr 17. 2023

동그라미는 정답만 좋아해.

아냐, 빵점도 좋아해.

아들이 카페에서 들려오는 라이브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손가락으로는 마치 피아노를 치듯 함께 리듬을 탔다. 길게 끄는 부분에서 함께 오래 누르고 있다가, 빨라지는 부분에서 저도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보고 있자니 신통해 가까운 피아노 학원을 알아보았다.


학원에 들어서니 어린 친구들도 많았다. 처음부터 건반으로 배울 수는 없다고 했다. 책으로 손가락 번호나 이론을 먼저 이해하고 실기를 한다고 했다. 어린아이에게 책 이론이 더 어렵게 느껴질 듯한데,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손가락 번호나 건반에 숫자를 써 놓았고, 선생님은 빨간 볼펜으로 빠르게 체크하며 커다란 동그라미로 답이 맞았다는 표시를 했다. 순간, 아들을 이곳에 등록시켜야 하나 살짝 갈등했다.



초등 3 남준이(가명)를 처음 만났을 때, 방문 학습지 영어책의 깨알 같은 단어들을 외우고 있었다. 말이 적고 순한 편이라 따라는 가면서도, 영어가 싫다고 했다. 맥락 없이 일정량의 단어를 외우고 시험을 보니 영어가 무척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듯했다. 상담 후, 그림책과 놀이로 접근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항공사에 근무하는 어머니 덕분인지 남준이는 공항이나 비행기와 관련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재활용 박스로 함께 공항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항이나 비행기 관련 단어들을 제법 알고 있었다. 익숙한 말들이다 보니, 영어라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버스가 버스인 것처럼. 한글인지 영어인지 헷갈리는 용어는 스스로 찾아보았다. 만들기에 진심인 남준이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한 번은 공항 지붕을 만들 때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모자라 다음 주에 하기로 하고 수업을 마무리했다. 수업 후에도, 남준이는 일주일 동안 문제 해결을 고민했나 보다.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해결책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며 뿌듯해했다. 학교 수업도 아닌데,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아이는 처음 봤다고 칭찬해 주니, 눈꼬리가 즐거워했다.


수업이 끝나면 영양 간식 한 상 차려놓고 기다려 주시는 남준이의 외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님은 남준이도 사촌동생이 가져오는 빨간 동그라미 숙제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해하셨다. 딱 떨어지는 진도 책이 있는지, 단어는 외우고 있는 건지도 궁금해하셨다. 정 많고 친절한 분이셨는데, 놀이로 진행되는 영어가 영 낯선 듯. 매번, 상자를 자르고 오려서 놀기만 하고 공부는 언제 하는가 궁금해하셨다.


동그라미 가득한 문제집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 무언가 컨트롤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잘라낸 박스 조각으로 어지러워진 방에 비해, 동그라미는 깔끔하고 확실하다. 다행히 어머니의 확고한 지지로 남준이와의 수업에 영향은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께선 여전히, 노는 수업이라 남준이가 좋아했다고 생각하실 것 같다.그리고 아직도, 동그라미 가득한 문제집 하나를 끝내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분들도 분명 계실 듯하다.


남준이의 이사로 과외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년 후, 6학년이 되어서 다시 연락이 왔다. 영어를 해야겠는데 그때 그 선생님이라면, 다시 해볼 수 있겠다고 하더란다. 이년 전 놀이 동무를 기억해 주고 이렇게 다시 찾아주니 참 고마운 일이었다. 레벨에 맞는 읽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신랑과도 프로그래밍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코딩을 좋아하는 남준이는, 신랑과의 수업이 꽤나 재미있다고 엄마에게 말했다고 한다.


가끔 방문을 열면, 조용한 두 남자가 키보드를 바쁘게 두드리고 있었다. 표현이 거의 없던 남준이가 그렇게까지 재미있어했는 줄은 사실 몰랐다. 이후,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몸으로 체험했는지, 질문은 내가 아닌 남준이가 하기 시작했다. 남준이의 책에 동그라미 한 번 그려 본 적 없지만, 남준이의 영어는 잘 자랐다.




지난 여름, 남준이 또래의 조카가 일본에서 놀러 왔었다. 아홉 살 조카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한글을 배우자고 제안하는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모나 할머니가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반감을 갖고 도망을 갔다. 그래서 이모가 직접 일본어를 배워 보기로 했다. 히라가나를 따라 쓴 노트에, 조카는, 펜을 하나 들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채점을 시작했다. 동그라미와 엑스표.


어른의 입장에서도, 채점을 받는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눈앞에서 희비가 엇갈리는 동그라미와 엑스. 아이들 심정은 오죽할까. 프랜차이즈 공부방 시스템에선, 스스로 채점을 하여 자기 주도를 이끈다는 과정이 있었다. 의도는 좋았는데, 자신의 오답을 지우고 정답을 베낀 후, 책에 동그라미 가득 그려 확인받으려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동그라미가 뭐라고. 대체 뭣이 중헌디.


<빵점 맞은 날> 이란 일본 그림책이 있다. 작문 콩쿠르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어린이의 작품으로, 아이가 빵점 맞은 날 느낀 복잡한 심정을 담고 있다. 여백 가득한 페이지에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아이의 표정만큼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빵점 맞은 시험지는 어지간히 중요한 문제였기에. 책 자체는 빵점 맞은 아이의 불안한 마음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문득, 스펠링 테스트에서 다 틀리고도 천진난만한 런던의 아이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 아이들은, 낮은 시험 점수로 인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 이 이해 될까. 혹은, 내 점수가 왜 엄마와 상관이 있는지... 아마, 이 책을 이해하려면 책 한 권이 더 만들어져야 할 지도. 동그라미가 무척 중요한 문화에 대해.


어쨌든, 이 또래 아이들이, 시험점수로 고민하는 주제의 영어 그림책을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더 읽어야 할 책이 많음을 깨닫는다.


 동그라미 속엔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담아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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