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이요...
"다른 표현 없나요?"
"000으로 쓰면 안 되나요?"
라이브아카데미 강의시간에 종종 나오는 질문이다. 빨간 모자쌤은 유연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가끔은 단호하게 자른다.
"지금은 이 소리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 소리를 외우세요. 이 표현을 스무 번, 서른 번 반복하세요."
다른 표현은 없을까라고 생각하는 그 10초 동안, 차라리 알려준 표현을 제대로 한 번 더 말해 보라고 했다. 빨간모자쌤의 직설적인 한마디가 마음에 든다.
그의 '가르침'은 마치, 검도 수련의 삼단계로 알려진, 수파리(守破離)의 첫 번째 단계인 '수( 守 )'와 흡사하다.
수( 守 )는 '가르침을 지킨다'는 의미로, 사부가 가르친 기본을 철저하게 연마하기 위해 지루한 반복을 거듭하는 단계
고등학교 시절, 클라리넷을 배웠었다. 악기를 조립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한 음씩 긴 호흡으로 8박자씩 끌어 악기를 깨우는 일이었다. 가장 낮은 저음부터 고음까지 소리를 고르게 내는 것을, 기교 섞인 곡의 연습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설령 어제보다 오늘 소리가 더 나아지고 있다손 쳐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기엔 그리 뛰어난 청각을 가지지 못했으니, 매일 반복되는 연습은 지루하게 여겨졌다. 놀고 싶은 여고생의 '농땡이'는 바로 이 기본기를 닦는 단계에서 가장 많이 흔들렸다.
다양한 표현을 유창하게 하고픈 성급한 마음에 비해, 하나의 표현이 내 것이 될 때까지 소리 내서 연습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대개, 000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나요 와 같은 영상을 보더라도, 머리로만 이해하고 쓱 넘긴다. 000을 영어로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수( 守 )'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아웃풋의 열매도 없다. 빨간모자쌤이, 다른 표현을 알고 싶어 하는 대신, 현재 배우고 있는 표현을 먼저 마스터하라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수( 守 )를 정직하게 수련했다면, 다음 단계인 파( 破 )로 갈 수 있다.
'파( 破 )'는 원칙과 기본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개성에 따라 독창적인 응용 기술을 창조하는 단계.
상황에 따라, 배웠던 표현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유창성을 늘려가며 말하는 재미가 생긴다.
마지막 단계인 '리( 離 )'는 어떤 단계가 될까.
'리( 離 )'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신기의 세계로 입문하면서 스승과 이별하는 단계
기본기를 탄탄히 연마해서 어느 정도 유창성을 이뤄냈다면, 이 단계에선 자신만의 어학습득 스타일이 구축된다. 라이브아카데미 빨간모자쌤의 강의가 없더라도, 런던쌤의 강의가 없더라도. 존경하며 따르던 두 선생님의 길과는 다른 독창성을 스스로 구축할 내공이 생기는 것이다.
신랑이 1965년도에 첫 발행이 된,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시리즈 책을 '아들을 위해' 주문했다. 처음에 보았을 땐, 취향도 아니고 지금 아들에게 맞는 레벨도 아니어서 (읽어주기엔, 아이 읽기 연습용처럼 딱딱하고, 아직 아들은 읽을 수는 없고)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
'Why?'
왜 이 시리즈여야 했느냐고 물었다. 신랑은 자신이 어렸을 때 읽으며 글을 배웠던 책이라고 했다. 아, 그런 추억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스토리는 만들기 나름. 아들에게 아빠의 추억 속 '교과서'로 둔갑? 시켜 소개했다. 아들은, 요새 책장을 넘겨 그림은 보고 있다.
보다 보니, 아이들이 막 읽기 시작했다면 쉽고 반복되는 문장과 스토리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가르치는 입장에서) 수업에 적용해 보니, 쉽다고 시작을 했는데 점점 많아지는 문장에 투덜거리다가, 결국 47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다 읽어냈다.
"책을 다 읽으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야."
"책 다 읽어가는데, 재미있는 일이 뭐죠?"
"기다려봐, 다 읽으면 알 수 있어."
"다 읽었는데, 뭐가 재미있어요?"
아이는, 국제학교를 목표로 한 친구라서 읽기 속도를 높이는 중이다. 그러나, 읽으라고 해서 읽었고 재미도 없다고 했다. 인정. 그럴 수 있음. 수고했으니, 그림책으로 힐링해 줄게. 그림책을 읽어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가 '자발적'으로 따라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말이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글을 보면 네가 읽고 싶어 진다는 사실이야.
수( 守 )의 힘. 책의 힘.
오늘도 수고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