쏠림 주의
지하철을 탔다. 삼십 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 구두를 신어 발이 편치 않았는데, 다행히 한정거만에 자리가 났다. 앉고 보니, 맞은편에 양복 정장에 중절모와 마스크를 쓴 어르신이 보였다. 바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살짝 마다하는 듯하다가 고맙다며 앉으셨다. 옆 자리에는, 얼핏 보니, 그래프도 많고, 온도 30도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으로 보아, 과학 관련 논문이었을까... 마감기일이 빠듯한 문서를 서둘러 검토하듯, 여기저기 표시를 하며 바쁘게 일하는 분이 있었다.
자리를 양보할 때, 문서 검토하시던 분은, 나를 한 번 보고 중절모 노인을 보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듯했으나, 브런치 구독 글을 읽느라 바깥세상에서 잠시 멀어져 있었다. 서너 정거 갔을까, 중절모 노인이 벌떡 일어나며 여기 앉으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 내가 다시 앉을 수 있게끔 해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문이 열려도 내리지 않고, 꼬박이 15분을 더 서서 가며 결국 같은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반 반 앉아서 가는 셈으로 배려를 해주었을까 싶어, 고마운 중절모 신사 이야기를 써볼까 구상 중이었다. 내려서 계단을 오르려는데, 문서 검토하시던 분이 앞서 가다 돌아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꼭 해줘야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이어폰을 빼고 다가서자,
"아까, 자리 양보한 그분, 옷차림이 그래서 그렇지 사실은 젊은 사람이었어요."
"아 그래요? 노신사처럼 보여서..."
"양보받았다고 앉는 것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옆에서 계속 눈치를 주니까 중간에 일어난 거예요."
"아 그랬군요. 감사해요."
"내 옆에 임산부 지정석에 앉은 그 사람도 젊은 남자인데, 앉자마자 자는 척 하기는... 에이...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그러게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아까 보니까 엄청 바쁘게 일하시던데... 그 와중에 멀티가 되셨네요. 대단하신걸요. 살펴 가세요!!."
가는 방향이 달라 헤어지며 엄지 척을 해드리고 웃음으로 마무리한 채 헤어졌다.
키가 훤칠한 멋쟁이 중절모 노신사의 배려 이야기는 순식간에, '자리를 양보받을 만큼 나이 들지 않은' 사람의 파렴치한 이야기로 바뀌어 버렸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바라본 모습과 멀티가 가능했던 그분의 시각. 예리함으로 치자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안경너머로 작정을 하고 쏘아본 그분의 눈이 더 정확했으리라. 나는, 그런 차림새가 대개 어르신의 인상을 풍기는 느낌으로만 판단을 내렸던 것이고.
What if... 노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리를 다시 양보해 준 중절모 신사에 대해 고마웠다는 글을 썼다면... 그마저도 내가 받아들인 세계이고 해석이니 가치가 있는 것인가. What if... 멀티 검수관이 틀렸다면, 그를 얌체 취급한 글을 쓰는 것이 괜찮은 일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필터링으로 세상을 보고 그에 대한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논문을 쓰기 전. 학자들은, 파란 펜을 파란 펜이라 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파란 펜일 수도 있다'라고 해야 한다. 언제든 새로운 학설이 등장할 때를 대비해서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깔고' 가는 것이다. 문득, 빨간 공룡이 없다고 말한, 그 젊은 엄마도 분명 할 말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 입장에서만 쓴 글의 무게를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인도 여성들이 입는 전통 의상 '사리'는 화려한 색깔과 문양이 특징이다. 관광객들을 태운 차가 인도의 평원을 지날 때, 사람들은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여성들을 사진 속에 담으며, 'beautiful'을 연발했다. 이때.
"여자가 도망을 가면, 멀리서도 눈에 띌 수 있게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히)게 된 것이다."
나의 지도 교수님은 이 한마디를 표정 없이 툭 던졌다고 한다.
존경하는 지도 교수님의 시각은 평범하지 않았다. 남들과 다르게 보는 시각과 탁월한 해석에 카리스마가 더해져, 인도 의상 사리의 화려함 뒤에 그런 슬픈 이유가 있었구나 감탄할 때. 정작 교수님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이국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려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사람으로 '따'를 당했다고 했다. (사진을 볼 때마다, 알고 싶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할 그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교수님... 묻지 않으면... 알려주지 말지 그러셨어요... 그러나, 교수님의 시각은 내 안의 틀을 깰 수 있도록 해준 분이다... 이번에도 교수님 편이 되어드리기도 했다.
세상을 보는 나의 해석이 틀렸더라도, 그게 내 세상임을. 그러나. 틀릴 수가 있으니... 늘 깨어있으라. 늘 배우라고 일러주셨던 분.
문득, 교수님의 예리한 언어가 듣고 싶은 밤이다.
어쨌든, 나이를 증명할 길 없는 중절모 남성은 글감을 하나 던져 주고 갔다. 이 사실은 확실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