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stand by you.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친구가 요 며칠 자꾸만 떠올랐다.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겼다가, SNS를 통해 한국에서 두 번 만나고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상태였다.
Time flies.
다행히 아직 친구 번호가 남아 있었다.
신호가 여러 번 울린 끝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귀국해서 만났을 때, 어린 두 아이의 엄마였던 친구.
아들 사진을 보고 까무러치게 좋아하며 기뻐해 주었다.
그 때나 이 때나, 좋은 일에 진심으로 함께 웃어주는 그녀의 천성은 여전하다.
그래서,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잊히질 않는가 보다.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면서, 난데없이 밴드부에서 들어간 이후,
얼떨결에 '문제아'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선생님들의 기피대상 학생 1호가 밴드부였다고, 2학년 수학 담임 선생님 첫 상담에서 전해 들었다. 어제와 같은 사람을 놓고 오늘, 반 아이들의 시선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낯설었다.
누구 하나 들고 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어수선한 쉬는 시간. 밴드부 연습을 마치고, 뒷문으로 슬며시 들어와 다음 수업을 듣는 특별할 것 없는 고등학생의 일상을 반복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뒷문으로 들어서는데, 무척 더운 여름날이었다. 새로 바뀐 짝꿍은,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고 의자를 빼주었다. 호의가 낯설던 때였다. 친구는, 마치 할머니가 평상에 누운 손녀를 보살피며 부채질하듯, 마음을 담아 내 더위를 식혀주려 했다. 지금의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땀을, 그때 어지간히 흘리고 있었다고. 오늘, 친구가 알려 주었다.
친구는,
자기를 다시 찾아 주어 정말 고맙다고 했다.
번호가 그대로라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때 너의 부채질이 십 년에 한 번씩 이렇게 떠오른다고 농담처럼 흘렸다.
친구는,
잠시 귀국해서 만났을 때도 했던 이 말을, 그땐 이해 못 했다고 한다.
부채질이 뭐라고, 그것 때문에 영국에서도 자기를 찾았을까 싶었다고.
그런데, 살면서 나락까지 떨어져 본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제야 내가 하는 말이 이해된다고 했다.
너무도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
누구라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웃어주며 손 잡아 주는 이가 있었다면,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했다.
친구에게,
브런치 글 읽기를 권해 보았다.
출간이 된 유명한 책들도, 인생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삶의 바닥을 치고, 다시 용기 내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웃의 이야기들이,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고,
말도 안 되는 실수에 허탈해하다가도,
감사한 마음으로 일상을 채워가는 이야기들이,
무엇보다
다양한 위치에서 보여주는 넓은 시야가,
지금
바로, 현실적인 힘이 되어 줄 것 같았다.
그저,
뭐라도 내가 알고 있는 도움 될 만한 것을 내어주고 싶었다.
하루 외출을 하게 되면, 체력이 모두 소모되어 다음 날 쉬어야 할 만큼
약해진 친구에게...
그러나,
이제, 자기다움을 찾고 싶다는 친구에게
그녀가 전해 주었던 고마운 부채 바람처럼,
그녀의 일상에 설레는 마음이 불어오길.
친구야,
우리 곧 만나서,
맛난 거 먹고 재미나게 놀아보자.
그리고,
언제든
call me.
I mean it.
photo: from <ma monde> by 강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