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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an 08. 2020

알림장이 뭐라고

그렇게 영원히 고통받을 애미


첫째가 아직 아기였을 때.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짐 속에서 그림 몇 장을 발견했다. 그중엔 빳빳하게 코팅된 것도 한 두장 있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냥 딱 남편의 어린시절 그림!!

"아니 뭘 이런 걸 아직 까지 갖고 있어!"
"한 번을 안 꺼내 볼 거. 이사 안 가면 어디 있는지도 몰랐을 걸? 그냥 버리지?"


나의 무심한 말에 남편은, 이거 다 어머님이 소중히 보관하던 거라고 말했다.


나의 입방정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다...


"어머, 진짜 어머님 웬일이셔 웬일이셔!!"
"아이고, 이런 거를 왜 다 갖고 계신 거여! 푸하하하!"
"아니 이걸 왜 아직 크크크그크큭"
"아니 진짜 뭘 이리 오래 갖고 계셨대~"
"나는 정우 이런 거 하나도 안 모을 거야. 이거 나중에 다 쓰레기 된다?"


자나 깨나 불조심 개조심 아니고 입조심.


지난주, 1학년 2학기를 무사히 마친 아들이 알림장 한 권을 다 썼다며 식탁에 턱 내놨다. 무심코 알림장을 펴봤는데...

.....


왜 뭉클하고 난리지?
대체 어느 부분에서?
나는 왜 이 알림장을 폐지함에 던져버리지 못하는가!!

알림장 못 잃어..
알림장 못 버려..


글씨를 쓴다고 썼지만
한글을 뗀다고 뗐지만.
처음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것들을 꾹꾹 눌러 받아 적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검사받았을 순간.
때로는 허세도 부리면서 자기가 잘 아는 글자를 옆 친구에게 가르쳐 주기도 했을 신나는 순간.
모르는 건 그냥 자기 멋대로 대충 써버리고 말았을 순간.
그렇게 하루하루 채워갔을 이 알림장에, 첫 학교 생활의 두근거림과 긴장감이 다 묻어있는 것 같아서 나는 이 너덜너덜해진 노트를 차마 버리지 못했다.


남들 다 모은다는 처음 빠진 앞니, 탯줄 이런 건 한 번도 집에 두고 싶단 생각을 안 했는데 알림장 보관이라니! 나 되게 이거 저거 잘 버리고, 몰래 버리고, 작품 수집 따위 좀처럼 안 하는 그런 엄만데. 이건 뭐 1학년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와 애미의 전리품 수준이다.

아.. 나도 이렇게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들바보와 보통의 시어머니로 늙게 되는 것인가!! 그래도 아들이 입었던 배냇저고리나 앞니가 며느리 집에 가게 되는 것보단 알림장이 낫지 않겠냐고 위로해본다...는 아닌가? 배냇저고리, 앞니 갖고 있는 거 되게 아름다운 장면인데 난 또 왜....ㅎㅎ


그리고 이 알림장 이야기는 남편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이미 아이 그림 한 장씩 벽에 붙여놓을 때마다 남편은 나의 '입방정 과오'를 꺼내들며 내게 실소를 날리는데, 알림장 얘기까지 하면 이건 두고두고 고통받을 소재가 될 것이다... 하하하하하하



영원히 간직될 알림장



제 입을 매우 칩니다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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