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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Feb 07. 2020

인생 첫 녹색학부모 체험기

등굣길에는 누군가의 수고가 서려있었다

 
시작-살다 보니 1)
어릴 때 등굣길에 봤던 그 녹색어머니를 살다 보니 내가 서는 날도 오는구나. 새삼스럽다.

의식의 흐름대로 메모해놓은 역사적인 첫 녹색학부모 체험기!(메모라며.. 왜 이렇게 길어??)


1. 녹색'학부모'
아직 녹색어머니가 더 익숙하지만, 아들네 학교는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녹색학부모'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모든 학교가 다 바뀐 건지 교장의 재량으로 바뀐 건지는 확인 안 해봤지만, 좋은 변화다. 녹색이 엄마만의 의무가 아니라 부모 중 누구든 되는 사람이 하는 게 맞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니까. 녹색어머니라고 불러도 상황 되는대로 알아서 아빠가 나가는 집도 있는데 뭘 그러냐 묻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단어나 호칭 하나의 힘은 크다고 말하고 싶다!


녹색학부모



2. 영하 12도
2주 전인가. 지구가 병들었나 싶을 정도로 이번 겨울은 왜 이렇게 안 춥지 하며 지냈는데 입방정은 과학인가. 1년에 한 번 서는 녹색 날이 영하 12도라니?? 응?? 깃발 가지러 가는 길에 만난 같은 반 엄마가 건넨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저희가 날을 참 잘 잡았어요 그쵸?"
(학기 초 학부모총회 때, 반별로 5일씩 배정되어 있는 종이에 날짜, 구역 골라서 자발적으로 이름을 써넣었다. 즉 내 손으로 잡은 날임.)

귀마개, 수면양말, 털부츠, 가죽장갑, 목도리,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나갔다. 학교 가는 길까지도 사실 견딜만하네~ 했는데, 학교에서 내 구역 쪽으로 돌아오는 길 슬슬 입질이 왔다. 한 자리에 5분 정도 서있으니 그제야 어? 장난이 아닌데? 싶었다. 지나가던 반 엄마가 "정우엄마, 발에 핫팩은 붙였어요?" 라고 했는데 그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몸은 괜찮은데 발가락 끝과 손가락 끝의 감각이 이미 집을 나갔다. 초딩엄마 10년 차의 짬바, 역시는 역시였다. 그녀는 나에게 "비 많이 오는 날은 더해..."라는 말을 귀띔해 줌으로, 아 추위만 어려운 게 아니구나, 비도 더위도 미세먼지도 다 어려웠겠구나 라는 진한 깨달음까지 전해주고 갔다.  


3. 꿀팁
혹한기 녹색학부모 꿀팁: 면장갑 얇은 거 끼고 그 위에 가죽장갑 덧끼는 걸 추천한다. 양말도 그냥 두 겹으로. 핫팩을 발에 못 붙이면 패딩 주머니에라도 넣고 가는 게 좋겠다...


4. 선의의 순환
아는 아이들에게 의식적으로 큰 소리로 인사를 해주었다.(그런 거 잘 못하는 편) 학기초의 좋은 기억 덕분이다. 비교적 일찍 혼자 등교했던 우리 아이에게 먼저 아는 체 해주고 인사해 주었던 몇몇 엄마들의 이야기를 아들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부끄러워서 아는 어른을 봐도 인사 잘 못하는 우리 아이를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녕! 학교 가는구나." 한 마디 건네주었다는 게 1학년 초보엄마였던 나에게 감동이었고 위로였다.

혼자 걸어가는 아이를 누군가 스치듯이라도 봐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나도 언젠가 저 날이 오면 최소한 얼굴 아는 아이에게만이라도 먼저 인사해 주어야지 마음먹었었는데 그날이 왔다. 내가 받은 친절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흘러가게 돼있는 원리, 신기하다.


5. 아들
집에서 나온 아들을 만났다. 아니 근데 나한테 왜 아는 척을 안 하지?? 멀뚱멀뚱 뒤에 서있길래 "정우 나왔네!!" 했더니 그제야 손을 살짝 흔들어 주셨... 동생들 난리 안 치고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냐고 물었더니 "응" 한마디 한다. 초록불 바뀌고 유유히 걸어가는 아들 뒤통수에 대고 나 혼자 오만 안녕~ 잘 가~ 타령.. 남들이 보면 옆집 애인 줄. 내 아들 맞아요...

나중에 물어보니 자기 그때 좀 우울했단다. 우울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뭐 엄마가 거기 말고 다른 데 서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시간이 어쩌구 저쩌구 엘레레렐레 하는데 진짜 저세상 화법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점점 더 멀어져간다


6. 녹색학부모의 중요성​
신호등 있는 횡단보도는 그렇지 않은 횡단보도에 비해 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 무리 속에서 무단횡단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한 명은 걸어서 한 명은 자전거 타고. 거 참 애들도 많은데... 싶었지만 사실 나도 무단횡단해봐서 누굴 나무랄 처지는 아니다. 행동 더 조심해야지.

차는 또 어떻고. 애들은 쩌~~기서부터 뛰어오고 차들은 아직 보행신호 끝나지도 않았는데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연애시절 밥 먹을 때 혼자 빨리 먹고 느린 내 속도를 기다리다 지쳐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다 먹었어?"를 물어봐서 나한테 핀잔을 듣던 전남친(현남편)처럼. 녹색깃발 눈치 한 번 보고 20센치. 눈치 두 번 보고 20센치. 눈치라도 보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것도 유치원 버스가! 끝나고 들어 보니 다른 작은 횡단보도는 그런 차들이 더 많았다고 했다.

녹색학부모의 중요성을 이렇게 또 체감하게 되다니. 사람이 모든 상황을 100프로 안전하게 지킬 순 없겠지만, 무탈한 등굣길 뒤에 누군가의 수고가 깃들어 있음은 분명했다.

누군가의 수고


끝-살다 보니 2)
깃발 반납하고 나서 한 엄마가 제안한다.
"추운데 따뜻한 차나 한 잔 하고 가시죠!"
아. 나 그런 자리 끼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묘하게 가고 싶었다. 너무 추워서 따뜻한 차 생각에 정신을 잃었던 걸까, 성격 좋은 S 엄마의 호탕함에 끌렸던 걸까. 집에서 할머니랑 지지고 볶고 있을 미물들을 등원시켜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뛰어갔지만 내심 아쉬웠다. 살다 보니 내가 이런 데 끼고 싶을 날이 다 오네. 새삼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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