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거실 저편에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두고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밥을 준비하며 듣는 거라 집중하긴 어렵지만 그래도노동요처럼 항상 bgm으로 틀어놓는 이금희 씨의 프로그램이다.
며칠 전 한 엄마의 사연이 나왔다. 딸이 알바비를 조금씩 모아서 자신의 생일에 오만원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단다. 이거밖에 못 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딸이 기특하고 고맙고 미안했다고. 그런데 얼마 후 사연의 주인공은 sns를 통해 또다른 사실을 알게 되는데... 딸이 남자 친구 생일엔2단케이크에 명품 시계까지 선물했다는 것!
너무 섭섭하고 서운했다고, 딸 생일 때마다 끓여 바친 미역국이 생각나면서 억울했다고, 나중에 딸이 남친한테 차이고 술 먹고 들어오면 해장국 같은 건 절대 안 끓여주겠노라고 사연의 주인공은 부글부글해했다.
"으악, 너무해!"
과몰입을 잘하는 나는 사연을 듣자마자 마치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서운함을 증기처럼 내뿜었다. 그리고 연이어 소개되는 청취자의 문자.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딸이 짠해서 해장국 끓여주실 거잖아요. 그게 엄마 마음이잖아요."
그런가, 그래 맞지, 결국은 해장국 끓여주는 게 엄마마음이려나... 하며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던 찰나, 진행자가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맙시다. 규정짓고 정의 내리고 그런 거 하지 말자구요. 부모면 이래야 한다고 억압하는 듯한 거요. '그래 니 속 쓰리지, 내 속 쓰리냐' 어머니도 해장국 안 끓여줄 자유 있구요. 소심한 복수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와. 시원하다!! 내 마음에 왜 무게감 비슷한 게 느껴졌던 건지 dj의 말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식이 짠해서 해장국을 끓여줄 때 끓여주더라도(내가 자식한테 진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걸 굳이 확인사살까지 받고 싶지는 않은 마음. 내 스스로 '아 이게 부모의 마음이구나' 기분 좋게 느끼는 거면 몰라도, '엄마 마음은 다 이래야지' 하는 강요 아닌 강요는 받고 싶지 않은 거. 엄마도 마음껏 서운해도 되고, 자식한테 너 한번 당해봐라 해도 된다고 누가 옆에서 말해주는 것만으로 섭섭함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규정짓는 건 위험하다며, 학생의 본분은 이거야, 여자라면 이렇게 남자라면 이렇게, 내 아이에게 너는 왜 이렇게 00하니,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물론 자주 튀어나오고 있지만), 정작 부모 특히 엄마에게 요구되는 행동과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스스로도 별 저항 없이 '그래 그렇지' 하고 꼬리를 내렸던 것 같다. 내 엄마가 그랬으니까, 소위 '좋은 엄마'라고 칭송받는 사람들이 그러하니까.
그 저녁, DJ에게 고마웠다. 엄마도 그럴 수 있음을 그대로 인정해줘서 고마웠고, 조건부 공감이 아니라 온전한 공감이어서 고마웠다. 볼륨 어지간히 높여서는 잘 들리지도 않는 공간에서 보석 같은 멘트를 들을 수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라 믿으며, 오늘도 '엄마라면 모름지기' 타령에서 한 발짝 물러나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