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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Aug 21. 2020

서툰 엄마를 다독여준 라디오 DJ의 한마디

선물처럼 받은 뜻밖의 위로



저녁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거실 저편에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두고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밥을 준비하며 듣는 거라 집중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노동요처럼 항상 bgm으로 틀어놓는 이금희 씨의 프로그램이다.



며칠 전 한 엄마의 사연이 나왔다. 딸이 알바비를 조금씩 모아서 자신의 생일에 오만 원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단다. 이거밖에 못 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딸이 기특하고 고맙고 미안했다고. 그런데 얼마 후 사연의 주인공은 sns를 통해 또다른 사실을 알게 되는데... 딸이 남자 친구 생일엔 2단 케이크에 명품 시계까지 선물했다는 것!

너무 섭섭하고 서운했다고, 딸 생일 때마다 끓여 바친 미역국이 생각나면서 억울했다고, 나중에 딸이 남친한테 차이고 술 먹고 들어오면 해장국 같은 건 절대 안 끓여주겠노라고 사연의 주인공은 부글부글해 .



", 너무!"

과몰입 잘하는 나는 사연을 듣자마자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서운함증기처럼 내뿜었다. 그리고 연이어 소개되는 청취자의 문자.


"에이,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딸이 짠해서 해장국 끓여주실 거잖아요. 그게 엄마 마음이잖아요."


그런가, 그래 맞지, 결국은 해장국 끓여주는 게 엄마 마음이려나... 하며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지던 찰나, 진행자가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맙시다.
규정짓고 정의 내리고
그런 거 하지 말자구요.
부모면 이래야 한다고
억압하는 듯한 거요.
'그래 니 속 쓰리지, 내 속 쓰리냐'
어머니도 해장국 안 끓여줄 자유 있구요.
소심한 복수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와. 시원하다!! 내 마음에 왜 무게감 비슷한 게 느껴졌던 건지 dj의 말을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식이 짠해서 해장국을 끓여줄 때 끓여주더라도(내가 자식한테 진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걸 굳이 확인사살까지 받고 싶지는 않은 마음. 내 스스로 '아 이게 부모의 마음이구나' 기분 좋게 느끼는 거면 몰라도, '엄마 마음은 다 이래야지' 하는 강요 아닌 강요는 받고 싶지 않은 거. 엄마도 마음껏 서운해도 되고, 자식한테 너 한번 당해봐라 해도 된다고 누가 옆에서 말해주는 것만으로 섭섭함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규정짓는 건 위험하다며, 학생의 본분은 이거야, 여자라면 이렇게 남자라면 이렇게, 내 아이에게 너는 왜 이렇게 00하니,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물론 자주 튀어나오고 있지만), 정작 부모 특히 엄마에게 요구되는 행동과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스스로도 별 저항 없이 '그래 그렇지' 하고 꼬리를 내렸던 것 같다. 내 엄마가 그랬으니까, 소위 '좋은 엄마'라고 칭송받는 사람들이 그러하니까. 


그 저녁, DJ에게 고마웠다. 엄마도 그럴 수 있음을 그대로 인정해줘서 고마웠고, 조건부 공감이 아니라 온전한 공감이어서 고마웠다. 볼륨 어지간히 높여서는 잘 들리지도 않는 공간에서 보석 같은 멘트를 들을 수 있었던 게 우연이 아니라 믿으며, 오늘도 '엄마라면 모름지기' 타령에서 한 발짝 물러나 봐야겠다.




소중한 부엌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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