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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나이 듦과 사랑이 선명해지는 시간

후회할 걸 알지만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아쉽다

by 아드리셋



고속도로 두세 시간을 달려 친정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아빠가 나와계셨다. 곧 도착할 거라는 문자를 보고 진작부터 내려와 계셨나 보다. 문득 아빠가 되게 나이 든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예순 중반이 채 되지 않은 젊다면 젊은 할아버지인데 말이다. 손주 본 지 9년 차라 사전적 외할아버지가 되어있은지는 오래인데 뭐랄까, 명절 저녁 9시 뉴스 속, 고향집 대문 앞에 서서 두 손 흔들어 자식들을 맞이하는 그런 진짜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집에 들어갔는데, 둘째가 영상통화할 때마다 갖고 싶다 노래를 불렀던 헤드셋 장난감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저얼대 사지 말라고 내가 가격 알아보고 생일 선물로 사겠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10월까지를 못 기다리고 비싼 토이저러스에 가서 이걸 사놓고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린 아빠가, 퇴직 후 시간 많고 할 일도 없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손주 갖고 싶다는 장난감을 사러가는 딱 그런 할아버지가 된 것 같았다.


하룻밤 자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엄마는 장조림이며 묵은지며 이거 저거 싸가야 할 것들을 말했다. 아빠는 묵묵히 듣더니 어디서 특대 사이즈 보냉백을 꺼내와 이거 처음 개시한다며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엄마가 읊은 음식들을 챙겨 넣었다. 낯설었다. 자주 볼 수 없었던 아빠의 이런 모습들이 익숙하진 않지만 왠지 따뜻했다. 마치 첫 아이를 낳고 키울 때, '아빠가 아기를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의아해했던 그런 기분이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지내니 아빠의 나이 듦과 사랑이 더욱 선명해진다.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을 다 덮는 희한한 뇌를 갖고 있어서, 섭섭한 말과 서운한 장면들이 유독 뚜렷하게 머릿속을 맴도는데, 이제 조금씩 희미해졌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나이 든 아빠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글은 이렇게 쓰지만 아마 이런 얘길 직접 아빠에게 전하는 일은 없을 거고, 어쨌든 이 글은 아빠가 안 볼 거니까 편하게 쓰는 거다. 특별히 안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친밀하게 바뀌기에는 너무 늦은, 언젠가 후회할 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하지는 않을 아쉬운 관계.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한 생각을 하란다고 행복해지지 않는 것처럼, 어색한 부녀 관계에 그러다 나중에 후회한다 말해도 금방 어떻게 되지가 않는다. 마음먹어서 될 거였으면 애진작에 그랬을 텐데.


이사로 멀어진 물리적 거리 덕에, 그간 감춰져 있던 가까운 심리적 거리를 보게 된다. 다행인 시간이다.




아빠의 테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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