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드리셋 Oct 05. 2020

꽤 괜찮은 부부 이야기

위기에서 빛나는 부부가 되는 날까지


"달리자!"
우린 같은 방에서 각자 핸드폰으로 카트라이더에 접속하고 로딩을 기다렸다.

"애들 일찍 잠든 거 같던데 방에서 뭐 했어?"
"아. 언니들이랑 카톡."
"무슨 얘기 했는데?"
"양가감정 든다는 얘기. 나 요즘 양가감정이 엄청 드는데 뭐냐면..."

나는 시작버튼을 누르지 않고 핸드폰을 잠깐 내려놓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놀이터 보면 엄마들이 몇 명씩 막 모여있거든. 친한 경우도 있고 어색해 보이는 경우도 있고. 학원도 같이 보내는지 엄마 한 명이 몇 명 데리고 다니기도 하고. 전화도 해. 언니 저녁에 불고기 해서 같이 먹어요 하면서. 그런 거 보면서, 이사 안 왔으면 계속 놀이터에서 애매한 사람들이랑 불편한 거 신경 썼을 거고, 혼자 있고 싶어도 사람들이 나오라 하면 고민하고 그랬을 텐데 안 그래도 돼서 막 좋은 거야. 근데 동시에, 아 나도 옆에 누구 있었으면 좋겠다 싶더라? 한 명이라도. 이런 생각 들어서 너무 놀랐잖아. 그리고 오늘 혜연언니가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그는 본격 게임을 시작하진 않았고 그날의 동전받기와  출석체크를 무심히 터치하면서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간간이 나의 정신건강을 걱정하는 듯한 리액션도 했지만, 나는 계속 그가 스타트를 누르나 안 누르나 은근하고 재빠르게 곁눈질하고 있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내가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하는 순간, 그는 게임을 시작하고야 말았다!

"뭐야? 나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뭐 이런 개매너가 다 있지?"

남편은 결혼생활 10년에 얻은 약간의 눈치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꽤 빠르게 직감하고 바로 주행종료를 눌렀다. 그러나 물은 엎질러졌다.

"아니 이거 사람들이랑 경기하는 거 아니고 그냥 혼자 달리는 거라 얘기 들으면서 할 수 있어서 생각 없이 누른 거야. 말해 봐 그래서 혜연언니가 왜? 뭐?"
"이거 연애 중인 애들한텐 '우리 헤어져' 감이다? 부부여서 다행이야 그치? 기분 나빠서 안 말하고 싶은데 그냥 말할게. 아니 오늘 혜연언니가....... 이랬대 글쎄!"

말을 다 마치고 나니 현타가 왔다. 마주할 어른이라고는 지 뿐인 내가 종일 속에 쌓인 감정과 이야기를 입 밖으로 처음 꺼내는데 홀랑 게임을 시작해? 근데 또 배알도 없이 하려던 말을 다~ 해버렸다고?? 작았던 외로움이 갑자기 커다란 서러움으로 증폭되어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남편은 이게 그렇게 까지 울 일인가 싶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래도 자기 할 말을 했다.

"미안. 그래도 바로 종료했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종료 안 하고 계속 게임하는 남자들도 많다 너?"
"야, 그게 말이냐 방귀냐? 그런 애들이랑 비교하는 게 말이 되냐? 이런 상황에서 바로 쌍욕 하는 여자들도 있다 너? 어? 그리고 뭐? 생각 없이 눌렀다고? 그게 죄야 죄. 생각이 없는 게 죄라고!!! 내가 그냥 나갔어야 했는데 말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줄줄 다 얘기했다!! 카트나 해야지."

이쯤 되면 각자 달릴 법도 한데 습관이 무서운 건지 '초대'를 누르고 우리는 같은 팀을 먹고 달렸다. 오늘따라 또 잘 된다.

"대애박, 1등. 나 실력 완전 늘었네. 여기 봐 나 굳은살 생겼다?"
"세게 누른다고 빨리 가는 거 아니거든? 그냥 살짝 눌러."
"그러니까. 아는데 안 되더라고. 근데 내가 막 쳐 울다가 이렇게 낄낄거리니까 호구 같냐?"
"뭐, 호구씩이나."

울어서 생긴 코를 훌쩍 거리며 그렇게 게임 몇 판을 더 했다. 실컷 달리고 남편은 폰으로 드라마를 보고 나는 아까 읽다만 책을 보러 거실로 나가려던 차, 남편이 말했다.

"치킨 시켜줄까? 기분 더 좋아지겠지?"
"어디서 수작이야."
"걸렸네."





연애 때, 생각 많은 나에겐 이런 게 너무 힘들었다. 쓸 데 없는데 에너지 소모. 각자 떨어진 공간에서 서로의 감정을 재고 의심하고 오해하는 거. 문자, 기껏해야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물론 결혼하고 같은 공간에 산다고 늘 싸움이 금방 풀렸다거나 마음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에너지 소모 말고 또 다른 종류의 고생이 대기하고 있었고 현재도 물론 진행형이다). 아, 감정을 숨긴 고상한 척도 한몫했으려나. 예쁜 말투로 오빠, 네, 네, 하던 거짓의 시절이었으니!
밑천도 드러났고, 조금의 내공도 생겨서 그런가. 따지고 대꾸하고 울고 사과하는 거, 옆에서 볶으면서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심하고 치졸한 사람으로 안 보이겠다고 꾹 참은 게 아니라 그냥 맘 가는 대로 울어버려서 속이 시원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에 쓸쓸함이 스쳤는데 양가감정 이야기를 하다 보니 더 울컥했나 보다.
남편은 오늘 같은 날 잘못 걸려서 카트 한 판 때문에 원망 옴팡 뒤집어썼고, 아내는 또 카트 세 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호구처럼 실실 쪼개며 전력질주를 하고.(꼭 1등을 해서 풀린 건 아니라고 우겨본다) 그러고 나서 자연스럽게 각자 할 일을 하러 갈 수 있는, 마지막까지 실없는 농을 칠 수 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부부여서 다행인 밤이다.





아몰라 달리자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두 마음이 충돌하는 사소한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