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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Dec 02. 2020

스스로 만들어보는 '좋은 부모' 이상형

기왕이면 남이 정해주는 거 말고!



엄마가 되고 나서 자주 ‘좋은 엄마’ 타령을 들어왔다(이 글에서는 좋은 엄마보다는 ‘좋은 부모’란 말을 쓰려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가 그렇다고 여기는 좋은 부모가 대체 뭔지 자주 생각했다. 엄마표 00를 해주는 것, 건강한 유아식을 챙겨주는 것, 주말마다 아이를 데리고 자연으로 열심히 나가는 것, 책육아에 힘쓰는 것,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해주는 것, 오래 가정보육을 하는 것, 매일 놀이터에서 두어 시간씩 뛰게 하는 것, 책에 나온 올바른 훈육을 하는 것, 여러 집과 어울리며 아이의 친구를 많이 만들어주는 것... 수도 없이 많은 좋은 부모의 형체가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나는 저런 엄마 되기는 글렀다는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주변 말들에 귀 기울이는 대신 내 기준 좋은 부모가 뭔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적어도 내가 생활에서 깨닫고 이상형을 그려보는 것이니까 누구한테 강요받는 느낌은 없을 거 같았다. 물론 스스로 정했다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이상형은 이상형으로만 존재한다더니...)






첫째, 때론 바른말 하기보다 사랑으로 봐주는 부모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옳은 소리보다 그저 사랑이 더 효과 있겠다 싶은 순간이 종종 생겼다. 잘못을 무조건 감싼다기보다, 사랑만 해줘도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겠다 하는 느낌. 이 어려운 기법은 아이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유효할 것 같다. 비난과 책망보다 위로 먼저 받고 싶은 날이 아이한테도 분명 있을 텐데...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힘들 거란 걸 안다. 매번 그렇게 하진 못해도 열 번 중에 한두 번 그렇게 해줄 수 있다면 선방 아닐까.

현실의 나는 ‘바른말봇’이다. 매번 사랑보다 바른말을 못 해서 안달이다. 별 것 아닌 문제 앞에서 아이를 들들 볶고 꼬치꼬치 옳고 그름을 따진다. 고작 아홉 살짜리 애가 태권도 포인트 문제로 나한테 살살 거짓말을 했을 때도 차분히 집에서 이야기 하기보단, 즉결심판해야겠다며 네가 틀렸다고 길거리에서 따다다다 훈계를 했다(훈계 맞아?). 아, 갈 길이 멀다.


둘째, 상대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주는 부모다. ‘두루미와 여우’ 동화를 가끔 떠올린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대접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이었던 친구들. 주둥이가 긴 병에 아무리 맛있는 걸 담아도 여우는 못 먹고, 넓적한 접시에 맛있는 걸 담아도 두루미는 먹기 힘들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것도, 무조건 부모가 아이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아이가 무엇에 더 가치를 두는지, 부모가 어떻게 해줬을 때 행복해하는지를 민감하게 들여다보고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의 나는 두루미다. 아이가 생각하는 사랑 말고 내가 사랑이라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랑을 표현한다. 아이를 먹이겠다고 돼지갈비를 정성 들여 만들던 어느 날. 나는 그깟 갈비가 뭐라고 양념을 계량하는 내게 놀자고 치대는 아들을 확 밀쳐냈다. 아들의 슬픈 눈빛이 가끔 생각난다. 그 애는 고기 먹는 것보다 엄마가 한 번 볼 부비대주는 것, 손 잡아 주는 것,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길지 모르는데. 나는 맛있는 거 한 숟가락 더 먹이는 게 사랑 아니겠냐며 음식 만들기에 늘 급급하다. 매사 이런 식이다. 갈 길이 멀다.


셋째. 삶으로 보여주는 부모다. 말에는 분명 힘이 있다.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함께 피곤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근데 말에는 힘이 없다는 말도 맞다. 말보다는 행동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예배시간에 늦어 부랴부랴 집 나서는 내가 “너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엔 힘이 없다. 콩이랑 파를 골라내면서 “너 편식하지 마.”라고 하는 것엔 힘이 없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자꾸 소파에 드러누우려는 내가 “너 온라인 수업 좀 똑바로 앉아서 들어.”라고 말하는 것엔 정말로 힘이 없다.

알고는 있지만 현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깝깝함이다. 행복하게 사는 걸 삶으로 보여준답시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사부작사부작했다. 글쓰기도 하고 뜨개질도 하고 소파에 기대어 책도 읽었다. 집안일을 최소화하고 내 시간을 잘 활용하겠다 맘먹었는데, 코로나로 길게 집에 머물던 아홉 살 첫째가 “난 커서 집안일하는 사람이나 돼야겠다”라고 한다. 엄마는 논댄다. 나름의 설명과 내가 왜 노는 것이 아닌지를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반의 반이나 알아들었을까? 현실은 그랬다. 갈 길이 멀다.








    

셀프로 불러보는 좋은 부모 타령이라지만 사실 아무 모습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다 멀었다. 평생 도달이나 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자주 들었던 생각이니까, 주도권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기분 좋게 애써 볼만 하다. 자잘한 과업들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저 세 가지중 하나라도 기억하고 적용하면 그래도 승산이 있을 테니까. 쉽진 않겠고 완벽할 필요도 없지만 이상형 하나쯤 갖고 있는 게 또 부모 노릇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내일 또 실패하더라도! 차마 확 놔 버리지는 못하겠는 나만의 좋은 부모 이상형이다.




엄마가 최고라고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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