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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an 05. 2021

낳아야 끝나는 둘째 고민

양면 중에 그저 좋은 점을 보며


맘카페에 자주 올라오는 질문이 있다. 놀이터나 키즈카페에서 누가 잘못한 건지를 가려달라는 질문에 이어 ‘둘째를 가질까요 말까요, 외동의 좋은 점은 뭔가요’ 하는 질문이다. 둘째를 낳아야 할 거 같다는 글에는 아이가 심심해 보이고 외로울 것 다는 이유가 많다. 항상 궁금했다. 동생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들 하는데 그게 정말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사랑을 독점했고 물질에 있어서도 온전한 내 것을 가졌다(아이러니하게 이것이 뒤에 나오는 편견의 이유가 되었지만). 내 방을 가위바위보 없이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음식을 가지고 욕심부릴 필요도 없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양보나 배려를 가르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었다. 우리 가족은 늘 단란했고, 조용한 걸 좋아하는 엄마에게 나는 골칫덩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외부적으로는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는 편견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부모의 양육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을 사람들은 형제자매가 없다고 무조건 그럴 거라 여겼다.(역시나 커보니 삼남매로 자랐어도 사회성 없는 친구들이 있었고, 외동으로 컸어도 핵인싸인 친구들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부모의 집중된 관심과 기대 부담되기도 했다. 엄마 아빠 입장에선 또래 형제가 없어 부모에게만 매달리고, 잠자리 독립도, 빈 집에 혼자 있기 미션도 모두 늦는 아이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난 외동 삶의 좋은 기억이 많아 요즘도 가끔 엄마한테 말한다. "엄마 나 외동으로 자란 거 아직도 정말 좋아." 그럴 때마다 엄마는, 니가 아직 우리 병시중 안 들어서 그렇다, 부모 임종 안 겪어서 외로움도 돈문제도 모른다 뭐 그런 말을 한다. 아직 온전히 느낄 순 없어도 세월이 더 흐르면 엄마 말대로 외로워지는 순간도, 남편과 친구는 채워줄 수 없는 빈 곳을(부모에 대한 추억을 나누는 일이라든지) 혼자서 근근이 채우게 되는 날도 올 것 같다.


그렇다면 역시 다둥이군! 많은 사람이 자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나보단 둘이 낫고 둘보단 셋이 낫다, 키우면서 개고생 해도 키워 놓으면 좋다고 말한다. 인정한다. 자식을 기르며 부모가 얻는 기쁨이 있고, 저들끼리 의지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저 고생이란 게 너무나 구체적으로 오늘 막 들끓고 있으니..

아이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자기들끼리 잘 놀 땐 참 좋다. 역시 외롭지 않군, 자기들끼리 놀기엔 다둥이가 최고지, 나도 좋고 너희도 좋고! 하지만 잘 노는 시간 세 배 이상의 싸우는 시간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치고받고 뺏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놀리고 약 올라 죽겠는, 열등감에 맨날 폭발 드릉드릉 시동 거는 애가 존재한다. 혼자라면 마음껏 해도 되는 행동들인데 동생들 때문에 제약을 받게 되는 경우가 큰 애에겐 자주 있다. 자는 아기 옆에서 시끄럽게 노는 게 죄는 아닌데. 가위를 쓰고 가끔 아무 데나 놓는 게 큰 죄는 아닌데 말이다(첫째에게 맞춰야 하는 게 정석이지만 실생활에선 참 어렵다). "형이니까 잘해야지"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애는 자동 눈치 장착에 알게 모르게 무거운 책임감 같은 걸 갖게 된다.

동생들이라고 살기 편한가? 온전한 자기 몫을 가지기 힘들고 첫째에 비해 집중 케어의 시간이 적다 보니 여러모로 손해를 본다. 나이가 적어 못하는 게 당연한데도, ‘아 모르겠고 왜 형은 하고 나는 못 해!’ 하는 열등감에 수시로 빠진다. 태어나자마자 사랑을 나눠 가져야 하는 사람이 존재했던 둘째도,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첫째도 나름의 짠함이 있다.

아이들이 그렇게 저마다의 사랑을 갈구하고 각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부모 또한 쉽지 않다. 난 너희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강조하지만 가끔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건 거짓말 같다며 혼란에 빠질 때도 있다. 지출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외식 메뉴며, 취 자리, 차 좌석 등등 의견을 조율하는 것도 상의 어려운 과제다.   





  

둘째를 고민했다. 하나도 충분히 들다면서도 네 식구가 되면 더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 가족이 될 것만 같았다. 주변에 다둥이 지인들이 많았기에 한 명 키우면서 죽는소리하는 스스로가 나약해 보여(?) 둘은 낳자! 하기도 했다.(셋째는 인생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그 시기를 굉장히 힘들게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외동으로 나고 자라 아들셋을 키우게 돼서인지 왠지 다둥이의 어려운 점을 더 열심히 나열한 것 같지만 외동을 찬양하는 글은 아니다. 자식으로서의 나와 부모로서의 나의 고충, 우리 엄마의 고충, 우리 아이들의 고충 뭐 하나 인정 안 되는 게 없으니까. 육아의 모든 부분, 어쩌면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렇겠지만 정해진 답은 없다. 좋은 점에 좀 더 무게를 실은 선택만 있다.

셋이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구름다리를 사이좋게 건널 땐 나도 구름 위를 걷는 것 마냥 ‘셋 잘 낳았지, 커서도 이렇게 서로 의지하렴‘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안 씻으려고 도망가는 애들 잡아다가 씻기고 밥 먹이면서 수발들고 울고 싸우는 소리 듣고 있으면 '내가 애를 셋이나 낳아서 이 고생을 하나' 하며 자아분열을 시작한다. 한 명 키웠다그 나름대로 아이에게 시간과 물질을 집중 할애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데리고 다닐 수 있었겠지만, "엄마 엄마 놀아줘 놀아줘, 나 혼자 못 있어 같이 가 엄마 엄마..." 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힘에 부치다 못해 ‘당장 둘째를 가져야 하나, 그럼 터울은 어쩌’ 하며 매일 딜레마에 부딪을 거다. 각각의 경우마다 감당해야 할 고충이 있고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며칠 전 친구가 둘째를 가져 말아 고민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너에게도 이제 결정만 남았다! 의견과 댓글은 충분히 받아보았을 테니 말이다. 어차피 낳기 전까진 혹은 묶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고민이다. 아이를 위한 게 어떤 쪽인진 아무도 모른다. 나를 위한 게 뭔지도 모르겠는 마당에. 그저 외동으로 키울 때의 좋은 점에 기대어, 다둥이로 키울 때의 행복함에 기대어 부부가 마음 합해 내린 결정과 판단을 믿는 것 그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행복해라 다둥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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