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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an 27. 2021

1. 유년 시절과 엄마 / 2. 국수와 엄마

엄마를 생각한 날



1. 유년 시절과 엄마

"우리 딸이 아들 셋을 키우더니 과거 얘기를 많이 하네."

엄마랑 통화를 했다. 요즘 희한하게 옛날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 아이 영어교육을 고민하거나 재밌는 책을 골라주다가 옛날의 나와 엄마가 스치는 거다.


"엄마 나 윤선생 영어 몇 학년 때 했지? 그땐 괜히 옆집 애 하는 튼튼영어가 더 재밌어 보였는데. 더 어렸을 땐 무슨 철판에 영어카드 끼우고 구멍 뽕뽕 난 데다가 펜으로 찍으면 소리 나고 그런 거 있었잖아. 뽀로로펜 전신 같은 거. 그거 하면서 영어 안 따라 한다고 엄마가 뭐라 그랬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왠지 그거 박스째로 엄마가 어디서 듣고 급한 맘에 질러버렸던 거 같은데?"

엄마는 하찮은 것을 기억하는 내 뛰어난 기억력에 감탄... 은 아니고 짐짓 놀라며 그걸 사서 니 아빠한테 핀잔을 얼마나 들었는지 같은 내가 모르던 이야기도 해주었다. 같이 전전긍긍하지도 않았을 거면서 살림하는 아내한테 핀잔주기는 흥, 하며 엄마 편을 들었다.(아빠 미안)


"근데 내 책 한 권씩 사다 주거나 같이 고르거나 빌리러 간 적은 없지? 세계명작, 위인전, 동화책 전집은 기억나. 좀 더 커서는 세종문고 가서 만화로 보는 어사 박문수 그런 시리즈 사줬잖아. 학습만화 사주면서 이런 거만 읽어서 되겠냐 걱정도 했고. 대학 잘 간 사촌언니가 얹혀살아서 괜히 비교도 당했지. 내가 심심해 타령하면 그 언니가 '심심하면 책 읽어' 하는 바람에 엄마가 날 좀 한심하게 생각한 것도 있었어 그치? 큰집에서 세계문학 완역본 가져와서는 쟤도 어릴 때 읽었다면서 나보고도 읽으라 하고. 난 내가 되게 못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 애 책 고르다 보니까 이제야 그게 아니란 걸 알겠더라고. 취향이 수준이 다 있는 건데. 망하는 건 아니고 돌아보니 웃겨서 그래!"


아이가 커가면서 과거를 자주 힐끗힐끗 돌아보게 된다. 연산 문제를 지겨워하는 아이를 보면 내가 뜯어다 버린 눈높이 수학이 생각나고, 그네 타는 법 가르치는 남편을 보면 두 발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주던 아빠도 생각난다. 첫 핸드폰을 손에 쥐었을 때 나는 어땠는지도 궁금하고(밥 먹을 때도 핸드폰만 들여다봐서 밥과 욕을 같이 먹었다는 소문이 있다), 화난다고 아이가 소리소리 지를 땐 나도 저만할 때 저렇게 격하게 화냈나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방에 처박혀서 죄 없는 책상 유리를 쾅 치던 장면이 지금 하나 떠오른다). 애들이 잘 먹으려나 고민하면서 배달음식을 시킬 때면 어릴 때 세 식구 자주 갔던 해물탕집, 전골집, 갈비집 생각이 난다.

유년시절의 조각난 기억을 엄마랑 나눌 땐 평소 몰랐던 집사님들의 오지랖, 아빠의 핀잔 같은 얘기도 들을 수 있다. 하나 있는 딸 뭘 시켜줘야 할지,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던 소심한 엄마가 했을 걱정들. 또래 엄마들이 말하는 거 들으면서 팔랑팔랑거렸던 귀와 정신,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애를 보면서 화를 눌렀던 시간. 젊은 엄마의 얼굴은 사진으로만 보지만 어린 나를 키우던 엄마 마음을 엄마의 목소리로 들으니 애틋하기도 하다. '내가 좀 더 알아봤더라면, 사람들을 더 많이 알았더라면, 니가 수학 싫다 해도 그냥 억지로 시켰더라면 너한테 여러모로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엄마의 후회엔 못내 아쉬워서 항변한다.

 

"난 불만 없고 원망도 안 해. 충분히 해줬지. 더 했다고 반드시 좋아졌을 거란 보장 어딨어? 관계가 틀어졌을지 돈만 날렸을지 누가 알아. 정보든 사람이든 지금은 오히려 너무 홍수라 없는 것만 못하기도 해. 책도 좋아할 놈들은 글밥 많은 전집만 잔뜩 꽂아놔도 읽더라. 이래도 저래도 할 놈은 하고, 좋은 과목 싫은 과목 능률도 달라 엄마. 그리고 엄만 사람들 더 많이 알았으면 불안해서 못 살았을 걸. 딱 그 정도 사람만 알았던 걸 다행으로 아셔."


뒤져보면 속상한 기억, 상처된 말 하나 안 나오겠냐만. 아이 키우며 종종 머리에 스치는 내 유년시절은 그래도 꽤 괜찮은 모습이다. 자존감이 엄청 높진 않아도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컸다(고 쳐야지!!).

엄마, 혹시 억울해서 죽을 거 같은 일 생각나면 삐삐칠 테니 엄마도 내 어린 시절에 대한 후회는 그만 해도 돼.





2. 국수와 엄마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최대 단점은, 자꾸 보다 보 밤에 종종 누군가 죽는 꿈을 다는 것인데(물론 뒤로 갈수록 오글거리는 장면과 난해한 드립이 많아졌단 걸 추가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한 건 국수집 씬이 나올 때마다 따뜻한 잔치국수가 먹고 싶어져 죽겠다는 거다. 추 여사 솜씨를 능가하는 이 여사(우리 엄마)표 국수를 먹고 싶지만 엄마는 멀리 살고, 당장 안 먹곤 못 배기겠는 경소문 시청자는 육수도 볶은 야채도 계란 지단도 필요한 그 귀찮은 잔치국수를 또 사오십 분 동안 준비하고 차려낸다. 다 만든 국수는 대략 십 분만에 사라진다(같이 사는 남자는, 아 남자가 넷이네, 어른 남자는 5분 컷도 가능).


"간단하게 국수나 끓여 먹자" 했다가 국수 대신 아내의 욕을 먹었다는 어떤 아저씨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 말은 분명 차리는 입장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온 말일 거다. 먹을 땐 호로록 이보다 간편하게 사라질 수 없는 게 국수다. 엄마도 그 말을 자주 했는데, 넙죽넙죽 받아먹던 시절에야 엄마 말대로 간단한 건 줄 알았지만 이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만드는 방법이 쉬운 거랑 과정이 간단한 건 엄연히 다르다!).
이여사는 우리가 놀러 가면 라면으로 때우자는 내 말을 안 듣고 굳이 따끈한 멸치육수를 내어 국수를 끓여 줄 때가 있다(이 말은 라면을 먹을 때도 있다는 것!!). "난 내가 할 수 없는 거면 몰라도 할 수 있는 요리는 하나도 안 귀찮아." 라면서. 베테랑 주부의 관록인지 자식을 향한 사랑인지 모르겠다(둘 다겠지?). 나도 30년 넘게 주부로 살면 그렇게 될까?


잘 모르겠고, 나는 같이 사는 저 남자들 앞에서 "오늘 점심은 간단하게 국수 끓였어." 하는 말(비슷한 말로는 '오늘은 간단하게 김밥으로 때우자' 등이 있다. 물론 천국 김밥 아니고 집 김밥.) 따윈 절대 하지 않겠다고 드라마 보다가 엄마 국수 떠올리고 내 손으로 국수 해 먹고 속으로 다짐해본 이야기 끝.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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