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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Dec 18. 2020

애 많은 엄마의 하루 한 장면 시리즈 <4>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록


목차

1. (가르칠 때 화딱지가 나면) 가족입니다

2. 자기만의 책

3. 잘 사는 것

4. 기질

5. 생일에 삼킨 말





#1. (가르칠 때 화딱지가 나면) 가족입니다​
아이의 숙제를 봐줬다. 글에 대한 내용으로 맞는 걸 고르는 문제. 제주도에는 260여 개의 오름언덕이 있다는 말이 첫 문단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제주도에는 단 한 개의 오름언덕이 있다'에 떡하니 체크를 한다. '다시 잘 읽어봐, 첫 문단을 잘 읽어봐'라고 세 번 네 번 말해도 아모르겠다고 아모르겠다고 아모르파티 하는 9세를 보며, 남편의 운전연수에 이어 가족끼리는 뭘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지난 주일에 내가 만든 뜨개가방을 메고 교회에 갔는데 아이 선생님께서 가방이 너무 예쁘다며 본인도 뜨개질을 꽤 오래 했고 좋아한다고, 딸도 요즘 퇴근하고 뜨개질을 배우러 다닌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잘하시면 따님은 엄마한테 배우면 되지 왜 나가서 배우냐 했더니 선생님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저도 그러기 싫고, 딸도 엄마는 맨날 구박만 한다고 싫어하더라구요."
역시. 가르칠 때 화딱지가 난다면 가족인 게 분명하다.


#2. 자기만의 책​
열 권짜리 그림책 세트를 샀다. 둘째를 위해 고른 거였다. "이건 니 책이야. 엄마가 지누 거 열 권이나 샀어."라는 말과 함께.
아이는 박스를 뜯자마자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책을 이고 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발등에 떨어질까 조마조마한 엄마 마음도 모른 채 동생도 형도 손도 못 대게 하고 곰돌이 푸가 꿀단지 안고 다니는 것처럼 소중하게 끌어안고 다녔다. 시간이 좀 지나고는 형아한테 빌려주면서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다 낸다.
'아, 그동안 너만의 책이 없었구나.'
항상 첫째를 위한 책을 샀다. 코로나로 집에 다같이 있던 기간에도 한글을 모르는 둘째는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첫째의 단행본만 심사숙고해서 골랐다. 이거부터 다 읽고 사줄게, 한글 읽게 되면 많이 사줄게, 아홉 살 되면 사줄게 같은 말들을 하면서. 책장에 있는 책은 형이 어렸을 때 읽었던 거 또는 니 동생이랑 같이 보는 거야 하며 사준 그림책들이 대부분이다. 요시타케신스케의 그림책들은 우리 가족 다같이 보는 거야 하며 사주기도 했다.

완전히 처음은 아니겠지만 오랜만에 자기만의 예쁜 그림책 세트가 생긴 둘째는 애착을 갖고 자기 전에도 며칠간 꼬박꼬박 그 책만 가져왔다. 어쩌면 물건 자체보다 엄마가 힘주어 말한 "이건 니 책이야." 말 한마디가 더 행복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온전한 자기 것을 가지기가 태생적으로 쉽지 않은 둘째. 세상의 모든 둘째들은 자기만의 책이 필요하다!(울프언니 따라하기)


#3. 잘 사는 것​
강원국 작가님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우선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한 삶에서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일 거다. 문득 하원 시간에 아파트 현관 복도를 타고 쩌렁쩌렁 울리는 내 분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만약에 옆집 사시는 분이나 아랫집 사시는 분이 우연히 내 블로그 글을 보고(혹은 나중에 내가 정말 잘 돼서 책이라도 내거나 뭐라도 나임을 추정할 수 있는 어떤 작업을 했을 때 그걸 보고) 본인의 이웃 그 아들셋 엄마임을 알아챈다면 이건 쥐구멍 갖고는 택도 없을 쪽팔림인 거다.
"어어? 이거 옆집 살던 그 여자 같은데?"
"그 여자 완전 미친년인데!!"
"아침 9시 반이랑 오후 4시만 되면 알람시계처럼 소리 지르는 미친 여잔데? 와 멀쩡한 사람인척 하고 쓴 글 좀 보소? 와!"
그래. 나는 지금 매일 쓰기에 집착할 때가 아니라 잘 사는 것, 제대로 사는 것에 집중할 때다. 오늘 4시부터 일단 입 꾹 닫고 조용히 들어오는 걸로...

(이것도 다 등하원 하던 시절의 얘기지.. 흑)


#4. 기질​
2학년 아들을 키우는 A가 말한다.
"얘 때문에 속 터져. 놀이터에서 다른 모르는 애들 무리에 가서 꼭 지도 껴달라고 해서 노는데 걔네가 보면 주로 3-4학년이거든. 근데 얘를 곱게 안 끼워주고 꼭 놀리고 속이고 그래. 근데 얘는 그렇게 멸시 천대 당하면서도 화도 안 내고 걔네랑 못 놀아서 안 달이다? 왜 저래?"
2학년 아들을 키우는 B가 말한다.
"우리집에는 놀이터에서 그렇게 남들 노는 거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애 있잖아. 걔네가 막 깔깔거리고 재밌게 놀면 지도 그 옆에서 헤벌쭉 입 벌리고 침 질질 흘리면서 웃고만 있는데 그것도 되게 속 터진다? 같이 놀자고 말 거는 걸 8년 동안 단 한 번도 못 봤잖아. 그러고 집에 갈 땐 재밌게 못 놀았다고 입 대빨 나와있어."
타고나는 기질을 무시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거.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러니 자식과 부모가 정반대 기질이면 얼마나 서로서로 천불이 날까. B가 아들과 정반대 성격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는 우리집 이야기)


#5. 생일에 삼킨 말​
내일 엄마 생일인데 파티해야 하니까 어린이집 안 가면 안 되냐는 너의 질문에,
일단 니가 어린이집 가주는 게 파티야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엄마 생일 선물로 돈 쓰는 선물 말고 돈 안 쓰는 선물 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너의 말에,
효도는 돈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생일카드 꼭 써야되냐길래 그럼그럼 한글 못 쓰는 사람 빼고는 다 써야지 라고 했더니,
아 나도 한글 못 쓰는 사람이고 싶다 라던 너.
겨우 옆구리 찔러 절 받았더니 생일카드엔 웬 '우리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적혀있네.
야 이건 내가 우리 엄마한테 해야 되는 말 아니냐, 오늘 혹시 어버이날이냐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린이집 다녀온 둘째와 돈 안 들인 선물 준 첫째와 함께 카드 읽으며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는 이야기. 난 케잌도 많이 안 먹었는데 삼킨 말이 너무 많아서 토할 것 같아!




자기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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