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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Mar 09. 2021

애 많은 엄마의 하루 한 장면 시리즈 <5>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한 기록


목차

1. 처방

2. 꼰대

3. 딜레마

4. 헛소리

5. 자존감                                                                              

6. 유전                                                                                                                                      7. 반찬

                                                                                                                                                                                                               



#1. 처방

아이한테 이상한 소리를 꽥 내뱉어버린 뒤 자괴감에 빠지는 밤이 종종 있다. 나는 왜 이거밖에 안 될까,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어야 할까, 나는 정녕 미친년인가. 그럴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육아서를 펼쳐들......리는 없고 친한 육아동지에게 푸념을 한다.

"나 이랬는데 이렇게 말했다? 미쳤지?"


그들은, 어 너 싸이코임. 어떻게 애한테 그? 라고 하지 않는다.

"왜? 니 말이 맞는 거 같은데?"

"충분히 그럴 만 해."

쉴드를 쳐준다.

그런데 굳이 니가 틀렸다고 조목조목 훈수 두지 않아도 내 행동이 틀렸다는 것,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이 사람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는구나, 나 빡칠만 했구나, 그래도 앞으론 좀 참아보자고 다독여보게도 된다.

정석을 알려주는 책을 펼쳐드는 것보다, 난 더 심한 말도 했다고 고백하는 동지들과 카톡 백 개 나누는 게 더 좋은 처방일 때가 있다.



#2. 꼰대

아들이 말한다.

"방학숙제 많아서 방학 싫어."

...

"야 너 양심 있냐. 주 2회 일기 쓰기, 독서록도 아니고 그냥 책 읽기, 운동하기 이게 전분데? 나 때는 탐구생활이라고 해서 아예 숙제 책자가 있었고 일기도 매일 써야 됐거든? 나는 몰아 쓰려고 달력에다가 그날 날씨를 다 적어놨어."

라고 말하면서 문득, 헥헥거리며 출퇴근하던 임신 8개월 때의 직장 상사가 떠올랐다. 자기 때는 애 낳기 전날까지 스튜디오 나와서 녹화 떴다고 비아냥거리던 그 사람. 마치 나 때는 애 낳은 다음 날도 밭 매러 갔는데 요즘은 조리원이다 뭐다 참 편하다고 비꼬는 어느 시어머니(우리 시엄니 아니고)같은 그 사람!

그걸 아~~는 사람이 아홉 살 아들한테 주제가 출산만 아니지 똑같은 꼰대질을 하고 있다니.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오늘부터 latte is horse 금기문장이라고 셀프선언 해야겠다.



#3. 딜레마

남편이 다이어트 간식을 주문했다. 내 건 아니지만 배고파서 그냥 한 번 까먹어본 이 닭가슴살 소시지는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너무 맛있잖아...

다이어트용 닭가슴살이라면 모름지기 맛이 없어야 되는 거 아닌가. 염도는 거의 서브웨이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햄 정도 되는 것 같았고 뜨거운 물에 데쳐 먹어봐도 소금기 가시지 않았다. 향은 또 어떻고. 성분을 보니 역시 글루탐산나트륨과 치킨스톡. 좋은 맛에 얘네가 빠지면 섭섭하. 다이어트용 아닌 목우촌 소시지, 휴게소에서 파는 대왕 소시지 꼬치랑 다를 게 없었다. 색깔이 희멀건 하다는 정도가 차이랄까. 쓰여있는 걸 보면 나트륨 함량은 크게 높지 않은데 혀 끝에 맴도는 이 진한 농도는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다이어트하려다가 건강을 망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드는 이 소시지를 계속 주문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딜레마에 빠진다.



#4. 헛소리

화가 잔뜩 난 채로 아이들한테 으름장을 놓기 전. "이거 제대로 안 치우면 각오해!"라고 말하려 했는데 내 입 "기대해!"라고 할 뻔하다가 더 삐끗해서 "기도해!"를 뱉어버렸다. 그 험악한 분위기에 기도해라니... 기대도 이상한데 기도라니. 평소에 기도라도 좀 하는 모범 신앙인이면 납득이라도 될 텐데.

밤 11시까지 뭉그적거리며 안 자다가 그제야 책 읽어 달라하는 아이한테, "너무 늦어서 안 돼"라고 말하려 했는데 "너무 늙어서 안 돼"라고 말해버린 속마음은 "엄마 늙어서 읽어줄 힘이 없다"를 말하고 싶었던 건가.

출산하고 헛나왔던 말실수 내 기준 베스트는, 콜드스톤(한때 유행하던 철판 아이스크림 전문점) 가서 토핑 고르는데 알바생한테 '고명'이라고 한 거, 은행에 통장 케이스 받으러 가서는 케이스가 생각 안 나서 통장 '껍질' 달라고 한 거, 마카롱집 가서 꼬끄가 생각 안 나서 마카롱 '껍데기'라고 한 인데 증상이 나아지긴커녕 요즘 더욱 난항이다.

무슨 단어가 생각이 안 나고 둥둥 떠 다니는데 잡히지는 않는 상태. 그래도 한 명 낳고는 고민이라도 하다가 뱉었는데 이제는 생각도 거치기 전 입으로 기괴하게 나와버린다. 건망증에서 멈추지 않는 출산과 뇌의 처절한 관계여.



#5. 자존감

스스로에게 차려주는 예쁜 밥상이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어느 유튜브에서 들었다. 마침 또 자기를 위해 샐러드를 매일 만들어 먹는 지인의 사진을 몇 장 본 터라 약간 자극을 받았다.

지금 아니면 먹을 수 없다는 딱딱이 복숭아를 반질반질하게 깎아 쪼르륵 놓고,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씨리얼을 준비했지만 애들용 플라스틱 그릇이 아닌 색다른 컵에다가 부어다. 주말에 가족들이 먹고 남긴 치즈 바게트도 한 조각 꺼내 복숭아랑 같이 예쁜 접시에 놓으니 뭐 없긴 해도 기분이 산뜻해졌다. 대접받는 느낌도 좀 나네 하는 순간! 옆에 앉은 애가 지 씨리얼을 엎네? 맞은편에 앉은 애는 보온병에 담아준 물을 엎네?

자존감을 높여보려는 시도는 결국, 내가 무슨 부귀를 누리자고 예쁜 상을 차리냐 아이고 아이고, 그냥 싱크대에 서서 먹을 걸 아이고 아이고, 겸상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이고 아이고로 끝이 났다. 곤죽처럼 퍼진 초코맛 첵스는 덤이다. 아무래도 '스스로에게 차려주는 예쁜 밥상' 앞에 '아무도 없을 때'라는 단서가 붙어야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6. 유전

송일국네 삼둥이가 2학년인데 키가 142센티라는 기사를 봤다. 키는 무조건 유전이라는 서장훈의 말을 듣고 이수근 아들은 밥은 먹어서 뭐 하냐며 밥도 안 먹는다던데. 내 아들 미안하다?

키도 키인데 눈 나빠지니 시력도 유전이랜다. 치과 가서 이 나는 게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랬더니 부정교합도 유전이랜다. 심지어 공부머리도 유전이라는 말을 듣고, 진정한 금수저는 따로 있구나 생각할 때쯤 만난 책 한 권이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이 미처 생각지 않는 요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어떤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오랫동안 행복을 연구한 석학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유전.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 (행복의 기원/서은국 저)


발췌해서 써놓으니 좀 이상한 책 같은데 다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아니 그래서 하다 하다 행복을 느끼는 것까지 유전이라니 너무 잔인하잖아. 유전을 거스르는 자 어디 있는가...



#7. 반찬

오늘 저녁은 또 뭐 해 먹냐는 내 말을 듣더니 첫째가 말했다.

"엄마 근데 이제 김은 좀 지겨워."

가뜩이나 생리통이랑 빗속 하원 때문에 밥할 힘도 없던 엄마는 아들에게 뼈를 맞고, 그 와중에 집밥은 또 먹고 싶어서 2만 원 이상이면 배달해준다는 동네 반찬집 sns를 둘러봤다. 진미채 주먹만큼이 3,500원 하는 걸 보곤, 내가 한 바가지 만들면 진짜 싸게 는 건데 싶어서 손가락만 떨며 주문을 망설였다. 럼 기왕 시키는 거 내가 못하는 깻잎절임이나 장조림 주문하자며 야심 차게 주문을 하고 반찬을 받았는데... 만 원 넘는 장조림은 고기도 적었지만 메추리도 달랑 8개뿐이었다. 한우래잖아, 애써 위로하며 후회하려는 찰나 반찬을 맛본 여섯 살 둘째가 외쳤다.

"오오 맛있어!! 역시 엄마는 요리사야!!"

다행이다. 다행인데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   

                   


그래 것기도 운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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