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양심 있냐. 주 2회 일기 쓰기, 독서록도 아니고 그냥 책 읽기, 운동하기 이게 전분데? 나 때는 탐구생활이라고 해서 아예 숙제 책자가 있었고 일기도 매일 써야 됐거든?나는 몰아 쓰려고 달력에다가 그날 날씨를 다 적어놨어."
라고 말하면서 문득, 헥헥거리며 출퇴근하던 임신 8개월 때의 직장 상사가 떠올랐다. 자기 때는 애 낳기 전날까지 스튜디오 나와서 녹화 떴다고 비아냥거리던 그 사람. 마치 나 때는 애 낳은 다음 날도 밭 매러 갔는데 요즘은 조리원이다 뭐다 참 편하다고 비꼬는 어느 시어머니(우리 시엄니 아니고)같은 그 사람!
그걸 아~~는 사람이 아홉 살 아들한테 주제가 출산만 아니지 똑같은 꼰대질을 하고 있다니.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기가 이렇게나 어렵다. 오늘부터 latte is horse 금기문장이라고 셀프선언 해야겠다.
남편이 다이어트 간식을 주문했다. 내 건 아니지만 배고파서 그냥 한 번 까먹어본 이 닭가슴살 소시지는 그야말로 반전이었다. 너무 맛있잖아...
다이어트용 닭가슴살이라면 모름지기 맛이 없어야되는 거 아닌가. 염도는 거의 서브웨이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햄 정도 되는 것 같았고 뜨거운 물에 데쳐 먹어봐도 소금기가 가시지 않았다. 향은 또 어떻고. 성분을 보니 역시 글루탐산나트륨과 치킨스톡. 좋은 맛에 얘네가 빠지면 섭섭하지. 다이어트용 아닌 목우촌 소시지, 휴게소에서 파는 대왕 소시지 꼬치랑 다를 게 없었다. 색깔이 희멀건 하다는 정도가 차이랄까. 쓰여있는 걸 보면 나트륨 함량은 크게 높지 않은데 혀 끝에 맴도는 이 진한 농도는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다이어트하려다가 건강을 망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드는 이 소시지를 계속 주문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딜레마에 빠진다.
화가 잔뜩 난 채로 아이들한테 으름장을 놓기 전. "이거 제대로 안 치우면 각오해!"라고 말하려 했는데 내 입은 "기대해!"라고 할 뻔하다가 더 삐끗해서 "기도해!"를 뱉어버렸다. 그 험악한 분위기에 기도해라니... 기대도 이상한데 기도라니. 평소에 기도라도 좀 하는 모범 신앙인이면 납득이라도 될 텐데.
밤 11시까지 뭉그적거리며 안 자다가 그제야 책 읽어 달라하는 아이한테, "너무 늦어서 안 돼"라고 말하려 했는데 "너무 늙어서 안 돼"라고 말해버린 속마음은 "엄마 늙어서 읽어줄 힘이 없다"를 말하고 싶었던 건가.
출산하고 헛나왔던 말실수 중 내 기준 베스트는, 콜드스톤(한때 유행하던 철판 아이스크림 전문점) 가서 토핑 고르는데 알바생한테 '고명'이라고 한 거, 은행에 통장 케이스 받으러 가서는 케이스가 생각 안 나서 통장 '껍질' 달라고 한 거, 마카롱집 가서 꼬끄가 생각 안 나서 마카롱 '껍데기'라고 한 것인데 증상이 나아지긴커녕 요즘 더욱 난항이다.
무슨 단어가 생각이 안 나고 둥둥 떠 다니는데 잡히지는 않는 상태. 그래도 한 명 낳고는 고민이라도 하다가 뱉었는데 이제는 생각도 거치기 전입으로 기괴하게 나와버린다. 건망증에서만 멈추지 않는 출산과 뇌의 처절한 관계여.
스스로에게 차려주는 예쁜 밥상이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어느 유튜브에서 들었다. 마침 또 자기를 위해 샐러드를 매일 만들어 먹는 지인의 사진을 몇 장 본 터라 약간 자극을 받았다.
지금 아니면 먹을 수 없다는 딱딱이 복숭아를 반질반질하게 깎아 쪼르륵 놓고,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씨리얼을 준비했지만 애들용 플라스틱 그릇이 아닌 색다른 컵에다가 부어봤다. 주말에 가족들이 먹고 남긴 치즈 바게트도 한 조각 꺼내 복숭아랑 같이 예쁜 접시에 놓으니 뭐 없긴 해도 기분이 산뜻해졌다. 대접받는 느낌도 좀 나네 하는 순간! 옆에 앉은 애가 지 씨리얼을 엎네? 맞은편에 앉은 애는 보온병에 담아준 물을 엎네?
자존감을 높여보려는 시도는 결국, 내가 무슨 부귀를 누리자고 예쁜 상을 차리냐 아이고 아이고, 그냥 싱크대에 서서 먹을 걸 아이고 아이고, 겸상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이고 아이고로 끝이 났다. 곤죽처럼 퍼진 초코맛 첵스는 덤이다. 아무래도 '스스로에게 차려주는 예쁜 밥상' 앞에는 '아무도 없을 때'라는 단서가 붙어야 자존감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송일국네 삼둥이가 2학년인데 키가 142센티라는 기사를 봤다. 키는 무조건 유전이라는 서장훈의 말을 듣고 이수근 아들은 밥은 먹어서 뭐 하냐며 밥도 안 먹는다던데. 내 아들 미안하다?
키도 키인데 눈 나빠지니 시력도 유전이랜다. 치과 가서 이 나는 게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랬더니 부정교합도 유전이랜다. 심지어 공부머리도 유전이라는 말을 듣고, 진정한 금수저는 따로 있구나 생각할 때쯤 만난 책 한 권이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이 미처 생각지 않는 요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어떤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오랫동안 행복을 연구한 석학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유전.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 (행복의 기원/서은국 저)
발췌해서 써놓으니 좀 이상한 책 같은데 다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아니 그래서 하다 하다 행복을 느끼는 것까지 유전이라니 너무 잔인하잖아. 유전을 거스르는 자 어디 있는가...
가뜩이나 생리통이랑 빗속 하원 때문에 밥할 힘도 없던 엄마는 아들에게 뼈를 맞고, 그 와중에 집밥은 또 먹고 싶어서 2만 원 이상이면 배달해준다는 동네 반찬집 sns를 둘러봤다. 진미채 주먹만큼이 3,500원 하는 걸 보곤, 내가 한 바가지 만들면 진짜 싸게 치는 건데 싶어서 손가락만 떨며 주문을 망설였다. 그럼 기왕 시키는 거 내가 못하는 깻잎절임이나장조림을 주문하자며 야심 차게 주문을 하고 반찬을 받았는데... 만 원 넘는 장조림은 고기도 적었지만 메추리도 달랑 8개뿐이었다. 한우래잖아, 애써 위로하며 후회하려는 찰나반찬을 맛본 여섯 살 둘째가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