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 코난북스, 위고. 세 출판사가 함께 펴내는 에세이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무튼, 이게 최고지! 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에 대하여 쭈욱 말하는 책. 이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나는 아무튼 으로 뭘 써볼 수 있을까'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가듯이라도 생각해보지 않았을까...(않았음 말구) 무궁무진한 이놈의 아무튼. 진짜 아무거나 다 갖다 붙여도 어색함이 없는 마성의 시리즈. 책이 조그맣고 얇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되는데... 전에 누군가가 이런 책은 어쩌고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해서 속으로 '야 니가 써봐, 저렇게 좋아하는 한 가지로 책 한 권 쓸 수 있는지.'라고 대꾸한 적이 있다. 한 가지 소재로 책 한 권을 채우는 공력에 나는 늘 감탄한다.(비록 내가 상상한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는 챕터도 있지만 그거랑은 관계없이)
그래서 아무튼간에(?), 나의 '아무튼'이 뭐가 있을까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혼자 손가락으로 꼽아보고 있을쯤, 자기만의 '아무튼, 000'를 함께 쓰는 모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500자씩 15일, 열 명 남짓한 멤버. 이 500자가 묘했다. 오늘로 14일차가 끝났는데 이건 다 쏟아내는 것도 불가고, 생략생략 다 빼자니 또 얘기가 안 이어지고. 500자 껌이지 했는데 줄이고 정리하는데 시간이 의외로 걸린다. 구구절절 말하는 거보다 나은 거 같기도 하면서 부연설명이 너무 적은 거 같기도 하면서...
친구 한 명은 이걸 쓰고 있는 나한테, 야 너는 중급자 코스로 도약을 하려 해야지 왜 초급자 코스에 있냐고 했는데, 야... 도약 개나 줘ㅠㅠ 난 지금 도약 같은 거에 관심이 없어. 스트레스받기 싫어. 말끝마다 개기는 열 살하고 싸우고, 손 안 씻고 도망가는 일곱 살 하고 싸우고, 여러모로 난국인 다섯 살하고 싸우는 하루하루만으로도 죽겠는데 뭔 도약이냐. 재밌을 만큼만 할래. 라고 답했다.(야망 없는 편...)
남의 500자 읽는 게 또 재밌다(글쓰기 얘기를 할 때마다 말하게 됨). 이번엔 다른 사람의 '아무튼'은 무엇인지 보는 거 자체부터 기대됐다. 열흘 동안 읽으면서 모든 글이 매력있었지만 정말 '잘 쓴 글'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내일 또 읽고 싶은 글.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나 싶은 글.
어떤 분은 '아무튼, 겨울'을 쓰는데 나는 겨울이 싫은 이유를 대라면 당장 열 개를 댈 수 있을 정도로 겨울을 안 좋아하지만, 이 글을 읽다보면 겨울을 좋아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막 설득되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며 쓴 '아무튼, 엄마'를 보면서는 덤덤하게 써서 더 슬픈,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아무튼, 핑크'를 보면서는 '나 그냥 핑크 처돌이야'가 아닌, 핑크가 자길 어떻게 위로해 주었는지 에피소드를 술술 풀어쓰는 능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내가 '아무튼 민트'를 썼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쓸 수 있었을까!!
가끔은 우리집 안에 좋은 소재가 많단 생각도 한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문젠데... 야 이거 소재 완전 좋다 아들아 '아무튼 바둑' 좀 써볼래? 남편남편 '아무튼 테니스' 좀 써볼래? 하고 싶단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둘 다 이런 쪽엔 흥미도 뭐도 못 느끼는 분들이라 그런 글을 원한다면 차라리 내가 바둑이랑 테니스를 배우는 편이 빠를 거 같다...ㅋㅋㅋ(물론 배울 생각 전혀 없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나의 아무튼은 '팬심'이다. 14일 동안 시간 지켜서 500자를 써낸 것만으로도 게으름뱅이 나 자신칭찬할 일이다. 쓰는 재미와 공개하는 용기는 또 달라서, 아직 그 모임 밖에선 공개할 용기가 선뜻 나지 않는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친근감은커녕 저항을 받을 거 같기도 하고(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편ㅎㅎ),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댄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일단 남은 오늘치부터 채워야지.
"아무튼, 000"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한 가지 정도 갖고 사는 거, 정말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아무튼'이 계속, 계속, 궁금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