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꾸준히 여러모로 피곤한 명절이다. 제사 때문이냐고? 아니다.양가 제사도 없다. 추석음식 하루 종일 만드느라 지쳐서 그런 것도 아니다. 어릴 때랑 젊을 때는, 공부 잘하고 있냐, 연애는 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별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김영민/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中)을 들어내느라 피곤했는데(그나마도 그땐 내 친척 내 가족들이었음), 결혼하고 나니 명절이면 오지랖 이상의 각종 섭섭함과 눈치싸움이 넘쳐나 피곤한 것이다.(물론 오지랖이 없어진 것도 아님. 이젠 배우자의 가족들까지 가세해 둘째는 안 낳냐, 기저귀는 언제 뗄 거냐, 맞벌이는 안 할 거냐 등등의 질문을 함.)
내가 소식좌라 그런가, 명절에도 그냥 먹고 싶은 메뉴로 편하게 먹었으면 좋겠는데(먹을 만큼, 하고 싶은만큼) 그게 안되는 부모와눈치싸움을 하는 거다. 올해는 안 하신다면서 또 잔뜩잔뜩. 이걸 만드느라 어깨가 아프고, 돈이 많이 들었고, 등등등...하시는데, '어머니 안 하시기로 했잖아요' 하면,'어떻게 또 안하냐?'의 반복.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난 애들이 김 싸 달라고 해서 김 싸서 간단히 먹이면 추석 음식 이만큼이나 해놨는데 안 먹는다고 섭섭또 섭섭...
양가 투어 또 빼놓을 수 없지. 기다리는 한쪽에선(주로 내 친정) 왜 빨리 안 오냐, 저녁까지 먹고 올 거냐, 언제 올 거냐 섭섭의 카톡이 오고. 그럼 또 난, 고모가 자기 친정으로 돌아왔으면 나도 가는 것이 맞거늘...? 생각하지만 뭐, 까짓 거 저녁까지 다 먹고 가는 거 정돈 나한테 별 문제 안된다.(늘 그래왔기도 했고양가의 거리가 강원도 전라도 사이도 아니므로 솔직히 상관없다)
시부모는 처가에선 언제 떠나냐(=처가에선 몇 밤 자냐) 물어보고, 효자 내 남편은 어머니 혹여 섭해할까 눈치 보며 거짓말을 하고.(아니 근데, 아침부터 꽉꽉 채워 이틀 보낸 하룻밤과, 밤늦게 가서 잠만 자면서 시작한 이틀 밤이 같은 걸까?)
이쯤 되면 스무명이 둘러앉아 "일! 이! 삼!" 돌아가면서 외치는 눈치게임이 더 쉬울 정도이고, 명절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냥 평소에 잘들 만나고 얼굴보고 모이는 건 어떨지, 필요하면 가족 편의에 맞게 날 잡아 제사를 지내든 추도예배를 드리든 하는 건 어떨지. 명절? 굳이? 효도와 가족애는 평소에 다지는 게 어떨지, 굳이 굳이 이걸 명절에 다져야 하는지!(를 혼자 생각해 봄...) 온갖 섭섭한 일들이 가지치기를 하는 이 명절은 대체 의미가 뭘까?!
지난 연휴, 시아버지가 말했다.
"며느리. 삼형제 키우느라 고생 많고 고맙다."
여기까지면 뭐 대충 딱 좋게 끝났을 텐데 어라? 이상한 게 덧붙여진다.
"내가 며느리 미워하기도 했지만..."
어어? 예쁨 받을 짓을 막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움받을 짓도 막 하지 않는 적당한 며느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되물었다.
"절 왜요?"
돌아오는 답변은 난데없이 이랬다!
"밥 먹고 치우지도 않고 설거지도 안 하고 앉아있고 그랬잖아."
자 이제 팩트체크에 들어가야지. 일기 나부랭이지만 팩트체크는 또 중요하니까여.
나는 밥 먹고 내 밥그릇 치우지도 않는 무개념 인간이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시댁에 가서 설거지를 매 식사 때마다 하지는 않았다. 무개념 인간은 아니지만, 밥을 빨리 먹고 먼저 후다닥 치우는 인간 또한 아니며(이삭토스트 하나를 40분 동안 먹고 앉았다고 친구들한테 욕먹는 사람 나야 나), 시어머니나 시누이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팔과 옆구리를 부비대며 "아유 아유 두세요, 제가 할게요!"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살갑고 밝고 싹싹한 E형 인간 또한 아니다. 하지 말라면 정말 안 하기도 했지만, 내가 할 타이밍이 딱 맞거나 상황이 그리 되면 그저 알아서 설거지를 하고 내 할일을 했다. 싹싹하고 훌륭한 유교 며느린 아니어도 뻔뻔하진 않고어쨌든 할 건 하는 인간. 식사 때마다 엉덩이 들썩거리며 팔 걷어붙이고 '제가 할게요'를 때때마다 하지 않은 게 죄라면 뭐 그렇다 칩시다.(그렇다 칠 생각 없음)
제가 할게요를 때때마다 하지 않은 죄
아무튼, 밥 먹고 설거지도 안 하고 앉아있어서 별안간 미움받은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발언에 대꾸할 말은 대략 다섯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다섯 가지건 여섯 가지건, 난 아무 말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 통하지 않을 49년생 어른 그리고 약주를 하신 어른에게 내가 굳이 뭘. 그치만 그건 그거고...좀 섭섭한데요?
우리 딸(남편의 누나)이 오늘 고생 많다, 우리 딸이 오늘 고생 많다 쇼파에 앉아 열 번 넘게 말하는 시아버지를 뒤로 하고 시아버지 딸이 저녁 차리는 걸 도왔다.(정말 도와야 할 때 돕는 것, 자발적 노동, 좋다 이거다. 어른 여섯에 애 다섯 밥상을 고모 혼자 어찌 다 차려. 아무리 자기 집이라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꺼이 같이 차릴 수 있다.) 그리고 조카 방에 팔자 좋게 누워 '모범형사2'를 보고 있는 남편한테 가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넌 누나 밥 차리는 거 안 돕고 속 편히 누워있어도 욕 안 먹어서 John... 좋겠다..."
(John..이 아니면 그 깊이가 표현안되는 정도, '매우, 정말, 아주'로는 아직 좀 더 긁을 부분이 남아있는 그런 상황들이 다들 있지 않은가?!)
"우리집 가서도 밥 안 차리고 누워있지만 우리 엄마아빠가 너 미워하진 않잖아.John...부러워 너.^^"
"아까 왜 입 다물고 있었니? 한 마디는 했어야지? 얘 할 건 다 하고 있다고, 이 갈비찜 며느리가 다 해온 거라고, 우리집으로 오시면 며느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부엌에서 하지 않냐고 뭐라도말 좀 보태지 그랬니? 49년생은 그럴 수 있어. 그치만 84년생은 그러면 안 돼..^^"
49는 그럴 수 있어. 근데 84는 안 돼.
뭐, 술 드셨으니 말 안 통할 거라 아무말 안 했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자기도 처가 가면 눈치 본다는 논점에 벗어난 말을 한마디 얹고, 아버지 저런 말에 너무 상처받지 말라는 사족을 두 마디 얹고, 자기 부모님은 그래도 다른 시부모정도는 아니지 않냐는 어떤 강한 믿음 같은 걸(이게 다 K땅에 정말 극악무도한 사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란 생각도 해봄) 세 마디 얹는다. 미안하다는 건지 안 미안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음...
결혼 10년 차가 넘으면 무언가 더 단단해질 거라 생각했다. 며느리로서의 마음, 가족으로서의 결속력 그런 거. 진짜 찐친 같은 게 되고 모든 게 편안해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물론 그런 면도 있긴 하다.(아무렴 쌓인 시간이 있는데) 서로가 좀 편해졌고, 흘려듣는 말도 초창기보다 많이 생겼으며, 그냥 잊고 자연스럽게 또 서로를 챙기는 순간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결국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는, 엄마같은 시엄마는 없다는 진실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하지 마라, 그냥 있어라 하는게 딸 같은 며느리가 아니고, 정말 안 하고 정말 그냥 있어도 영원히 뒷말 속말 하지 않는 것이 진짜 딸같은 며느리라는 진실!
우리나라 John... 멀었단 생각이 든다. 기본만 하자는 생각도 한다. 보이지 않는 애씀과 마음 그리고 잘한 것들은 어차피 기억도 안 해줘! K 시엄마는 정말 되기싫다. 쓰다 보니 명절의 좋은 점은 이건가. 이런 사실들을 새삼 깨닫고 다짐하게 해주는 것.
섭섭해지는 명절은 물러가라... 그렇게 따지면 뭐, 다른 날에 가족들 만나도 어차피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다른 날도 마찬가지다. 이미 뭐 섭사례는 차고 넘친다. 섭섭함이 명절에 '특별히' 생긴다는 게 아니다. 명절은 그 감정을 더욱 '공고히' 하기 안성맞춤이라는 거다. 아이들에게 조부모와 함께 하는 명절의 추억과 옛 풍습과 전통과 음식을 이해시키고 경험시키고.... 아니 됐고요, 그냥 평소에 모여서 보드게임도 하고, 맛있는 쿠키도 나눠 먹고, 동태전과 나물보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먹고 뭐 그래도 되지 않을까. 애틋한 기억,따뜻한 추억,가족끼리 누릴 수 있는 경험은 '명절'이 아니어도 충분히, 얼마든지, 선사할 수있다.